다 잊었노라
나는 학원을 닫고 나서 내내 죄책감에 휩싸여있었다. 홀연히 떠난 내게 학생들이 상처받진 않았을는지, 우리가 진심을 나누던 시간들이 허공에 흩뿌려졌다고 생각하진 않았을는지 그런 것들이 걱정됐다. 혹여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니었다고, 나도 너희만큼 진심이었다고, 근데 진심이었던 만큼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다 졸업 후에도 스승의 날마다 연락 주던 제자를 만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게 됐다. 고마운 연락을 줄 때마다 “얼굴 한번 보자~ 다음에 한 번 보자~” 하다가 이제는 정말 한번 만나야 할 것 같아서 밥 약속을 잡았다. 모든 게 좋았다. 모든 게 반갑고 좋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전해 들은 이야기는 뜻밖이었다. 5년 전쯤 학부모께서 나의 고등학교 생기부를 복사해도 되겠느냐고 물으셔서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 제자는 그때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가 그때 큰 충격과 상처를 받으셨다고, 그러니 선생님께서 사과를 해주셨으면 한다고. 당혹스러웠지만 그 일은 너무 예전 일이고 나는 잘해주시던 기억들만 가지고 있으니 어머님께 마음 쓰지 마시고 잊으시라고 전해드리라 했다. 그런데 내 사과를 받지 못해서였을까? 이야기는 30분 동안 같은 곳을 빙빙 돌았다. “그때 선생님이 뭐 개인정보보호법에 대해서 공부한다나? 그러면서 그러셨잖아요. 지금 돌아간다면 복사를 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쓰셨을 텐데 그땐 선생님도 어리셨으니까요. 그렇죠? “
나도 참 아집이 센 게 상대가 사과를 바라는 게 눈에 보이니까 죽어도 사과하기가 싫더라. 난 다시 돌아가도 내 생기부를 복사해서 보관하시지 못하도록 했을 테니까.
혼란스러웠다. 이 친구는 왜 나에게 연락했을까, 정말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었을까, 사과를 받고 싶은 거였을까.
밥 사주고 커피 사주고 돈은 돈대로 쓰면서, 22살이 된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편지에 가득 담으면서, 선물을 정성 어리게 포장했던 내가 바보 같았다. 그래서 속이 많이 쓰렸는데, 좀 지나니까 덕분에 나는 죄책감에서 밀려 나왔다. 이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학생의 말도, 학부모의 말도 정말 기억이 안 난다. 신기하지? 그만둔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누가 왜 그만뒀느냐고 물으면 ”힘들어서 그만뒀는데, 다 잊어버렸어요. “라고 말할 것 같다.
다 잊었노라.
이제 다시는 교육계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확신이 그 기억들을 빠르게 잊을 수 있도록 해준 것 같다.
고시생이 된 지금은 강의를 들으며 왁자지껄한 현장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생각에 잠기곤 한다. 그럴 땐 아이들이 조금 그립다. 그래도 그때에 내 말이, 다 잊었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