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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쪽 Aug 31. 2020

말더듬이였던 내가 6시 내 고향에 출연하기까지

나는 7살 때까지 말을 못 했다.


거기에 더해 심하게 말도 더듬었다. 내년이면 학교를 가야 하는데 말을 못 해 놀림받을까 걱정이었던 엄마는 나를 9살에 학교를 보내자고 했고

아빠는 내 딸이 어디가 못나서 학교도 못 들어가는 병신취급을 하냐고 노발대발했다.


입에서는 하고 싶은 말이 맴도는데 말을 하려고 하면 목구멍이 떨어지지 않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 부르는 것도 어려웠다.

"ㅇ...ㅓ.. o.....ㅓ"

o 한 철자 목소리로 내기까지 나는 나와 수없이 많은 싸움을 해야 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심호흡을 하고 또 하고 주먹을 쥐고 또 쥐었다. 결국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쥐었던 주먹을 폈을 때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내가 말을 더듬으면 엄마, 아빠는 신경질을 내며 인상을 찌푸렸고 그건 곧 부부싸움으로 이어졌다. 부부싸움이 끝나고 나서도 내 마음속에는 꽤 오랫동안 부모님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그럴 때마다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그래서 더듬을 봐에는 입을 다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밥상이 몇 번 뒤집히는 싸움 끝에 다행히 나는 8살에 초등학교를 입학했다. 1학년 때는 학교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2학년 때는 행여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쳐 발표라도 시키는 재앙에 맞닥뜨릴까 책만 뚫어지게 봤다.

말 못 하는 나는 최대한 그림자처럼 지냈다.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 A가 일본어 말하기 대회에 나가게 됐다.  담임선생님은 매일 아침 조회시간마다 A를 교단앞에 세워 말하기 대회 연습을 시켰다. 우리 반 모두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로 시작하는 말하기 대회용 원고를 한 학기 내내 들어야 했다.  A는 3분 남짓한 원고 내용을 까먹어 자주 버벅거렸는데 나는 1학기가 끝날 즈음엔 노래 가사 외우듯 줄줄 읊었다.  A는 수상에 실패했고 우리는 2학기 내내 A의  "따샤 징꺼웨이"로 시작하는 중국어를 들어야 했다.


너무나 우습게도 나는 오겡끼데스까 덕에 말문이 트였다. 처음 들어보는, 무슨 뜻인지 알길 없는 일본어는 내게 말 같지가 않았다.

“말"을 하려고 하면 목구멍 탁 막혔는데

“말"같지도 않은 말을 하니 목구멍이 뻥 뚫렸다.


그 이후 나는 그동안 떼인 말 값에 이자까지 쳐서

받아내는 빚쟁이처럼 정말 많이 잘 떠들었다.

내가 하는 별말 아닌 말에도 친구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내가 입을 열면 모두가 집중했고, 어김없이 웃었다.  말 더듬이 었던 내가 말로 친구들을 웃기니 못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당시엔 말하기 대회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만큼 말하기 열풍이 불었었다. 말하기 대회가 열릴때마다 반 친구들은 모두 나를 추천했고그렇게 나는 우연히 말하기 대회에 데뷔를 하게 됐다.  

친구들에게 수없이 수다를 떨면서 똥 싼 얘기도 잘만 풀어내면 콘텐츠가 된다는 걸 나는 알았다.

말하기 원고를 대게는 웅변학원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써주는데 나는 내가 직접 썼다. 대회 주제에 따라 심사위원이 듣고 싶어 하는 내용으로 기승전결을 입혀 때론 재미있게 때론 장엄하게 풀어냈다.

내가 쓴 글을 내가 말하니 외우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그리고 한번 뚫린 말문은 많은 사람들 앞에 섰을 때 더 자신이 붙었다.


첫 대회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느꼈던 긴장감은 마이크 앞에 섰을 때 짜릿한 전율로 바뀌었고, 내 한마디 한마디 받아 적듯 집중해서 듣는 청중들의 반짝이는 눈빛은 나를 금세 사로잡았다.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을 땐 교장선생님이 너는 우리 학교의 자랑이라고 하셨다. 학교의 자랑이 된 나는 대회 참가를 위해 서울 찍고 대전 찍고 대구도 갔다. 거의 트로트 여왕 장윤정급 스케줄을 소화했다.


나의 말하기 실력이 절정에 달했을 즈음 나는 전국 팔도 사투리 경연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자신이 속한 지역의 사투리를 누가 더 맛깔나게 하는지 겨루는 말하기 대회였다.(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듯 하다) 각 도에서 예선을 뚫고 올라온 실력자들인 만큼 대회장 열기가 대단했다.

" 혼제 옵서얘,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긍께 나가 말이시" 팔도 사투리가 어우러져 대회장이 화개장터로 변할 즈음 드디어 내 차례다  

"으매 아줌니 시방 오셔유 오늘은 다른때보다 쪼깨 늦으셨네유” 로 시작하는 충청도 사투리가 장내에 퍼졌고 심사위원들의 표정을 보고 나는 알았다.

내가 1등이구나.


사투리경연대회는 다음 해에도 열렸고 교장선생님의 강력한 권유로 나는 2년 연속 참가하게 됐다.

대회 전날 KBS 6시 내 고향 팀에서 학교로 연락이 왔고 대회 당일 아침부터 나와 함께 동행하는 콘셉트로 전국 팔도 사투리 경연대회에 대해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가 아닌 걸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해 나는 KBS 카메라 앞에서 1등 상패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당시 취재를 나왔던 리포터분이 내게 말했다

"학생 어쩜 그렇게 떨지도 않고 말을 잘해. 아주 꾼이다 꾼"


그 이후 다시 TV 출연을 한적은 없지만 일상 속에 우연히 만나는 무대가 있으면 나는 언제든 기꺼이 올라간다. 그 무대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막힘없이 하고 박수를 받으며 내려올 때 나는 생각한다.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거짓말이다. 말을 해야 상대방이 안다.  어린 시절 말을 못 해 나는 외롭고 억울했고 답답했다. 요즘도 나는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머뭇거릴 때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맺힌다. 아마 7살의 내가 37살의 내게 보내는 오래된 신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상대방에게 하기 어려운 말이라도 두 눈 질끈 감고 일단 말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한다. 말해서 행복하다고.


혜민 스님은 행복은 연결감을 느낄 때 온다고 했다.그 연결감은 나를 풍성하고 행복하게 해 준다. 내가 기억하는 연결감의 첫 순간은 내가 말을 하면서부터다.

내가 하는 말에 손뼉 치고 웃는 친구들 속에서, 그리고 내 말을 진지하게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심사위원들 속에서 나는 연결감을 느꼈고 행복했다.


나는 물론 지금도 말하는 걸 좋아한다.

항공사에 취직해 손님들과 치열하게 싸우기도(?)하지만 대게는 그들과 일상을 나누며 많은 말을 하고,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게 더 좋다는 남편을 만나 아낌없이 말하고 있고,

못하는 말이 없는 4살 딸아이와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 직전까지 쉼 없이 말한다.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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