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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Oct 15. 2020

S# 13 성城 위에 도시를 짓다 3

https://brunch.co.kr/@martis/6


앞서 쓴 포스팅에서 말한 것처럼 20세기초 서귀포는 도시라기보다 외곽 방어진지가 구축된 작은 마을이었다. 현재 천지동, 정방동에 해당하는 일주도로 주변에 집들이 모여 있었다. 일주도로 남쪽인 서귀포항 인근에는 민가가 드물었다. 서귀포는 19세기말 일본 어부들이 근대적 어업을 도입하면서 발전한다. 그 이전에는 주로 잠녀(일제 이후 해녀라 명칭이 변경)들이 전복이나 소라, 해산물 채취를 주로 하는 포작浦作이 주류였다. 해안 마을보다 중산간을 중심으로 마을이 발달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산남(현재 서귀포시 행정구역)은 제주시에서 비교적 왕래가 쉬운 동쪽의 정의현, 서쪽의 대정에 현청을 두었고 이 곳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된다. 달리 표현하면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서귀포 구도심 지역은 제주에서도 가장 변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정강점기 행정구역/1935년 이전


한일병탄 이후 일제의 필요에 의해 서귀포항이 개발되고 현재 시가지 원형를 갖춘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현재 구글 위성사진을 보도록 하자.



https://goo.gl/maps/Xk53uPkcNxw1SdsF6

구글 위성지도 2020년


현재 서귀포는 중앙로터리를 중심으로 방사형 구조를 보여준다. 이는 1970년대 이후 형성된 시가지 형태로 해방 직후에 촬영된 항공사진을 보면 아래와 같다,    


1948년 5월 13일/ 국토지리원



해방 3년 후 촬영된 항공사진이다. 동서로 뚜렷하게 보이는 선이 일주도로다. 건물의 수는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다. 현재 서귀포 도심의 중심인 일주도록 북쪽의 집들은 어림잡아 100호도 되지 않는다. 대부분 건물이 일주도록 남쪽, 즉 현재 송산동 지역에 밀집해 있다. 도시의 남북을 연결한 항구로 동편에는 서귀포초등학교를 비롯해 과거 전분공장으로 추정되는 건물 외에는 거의 논이나 밭이다. 서귀포항도 새섬과 연결된 방파제 안쪽의 내항과 물양장이 보인다. 서귀포 외항은 70년대 이후 건설되었다. 


1948년 위성지도 당시 서귀포는 면面 단위 시절의 모습이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읍으로 승격한다. 1935년 제주도 우면이 서귀면으로 이름이 바뀐다. 이 우면에 항공사진에서 보이는 서귀1,2,3리가 속했다. 1935년 이전 서귀포는 '리里' 에서 시작된다. '리里' 조차도 19세기 말에 비하면 상전벽해나 다름없다. 서귀포가 '리'에서 '시'까지 불과 100년만에 제주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직적 '신분상승'한다. 첫 단추는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근대적 등기제도는 1906년 10월 26일 칙령勅令 제 65호로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과 2년 뒤인 1908년 7 월 16일 공포된 칙령 제47호 「토지가옥소유유권증명규칙土地家屋所有有權證明規則」을 제정, 시행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이전까지 땅 문서, 집문서는 개인이 보관하고 이를 통합 관리하고 소유관계를 다루는 제도와 기관이 명확치 않았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3월 18일 제령 제9호로 조선부동산등기령 을 제정하였지만 이는 일본의 부동산등기법을 준용한 것에 그쳤다. 토지대장이 정비되지 못한 때문에 부동산 등기령은 미루어지다 토지조사사업의 진전과 함께 시행된다. 당시 우면 서귀리 또한 1914년 5월 토지제도가 완성되어 등기업무가 시작되었다. 서귀포의 토지조사사업과 등기제도는 1918년 완결된다.


토지조사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토지의 위치, 경계, 명칭, 용도, 소유관계 및 토지대장을 정리한 것이다. 서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가기록원의 기록물에 따르면 전라남도 제주도 우면 서귀리는 1914년 5월 17일 토지조사와 측량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서귀리 토지조사원도原圖는 15구역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부분마다 필지분할, 현재 주소지의 기본이 된 번지수와 소유자, 답畓과 전田, 임야林野, 집터인 대지垈地 그리고 도로와 구거溝渠-수로-, 묘지가 기록되어 있다.


1914년 전라남도 제주도 우면 서귀리 토지조사 원도 표지/국가기록원


원도 표지를 보면 서귀리 지역이 15개 지역으로 등분된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원도 상세부분


현재 법정동인 서귀동 구역(점선 내)



서귀리는 현재 서귀동(법정동) 구역과 거의 일치한다. 서귀리 양쪽은 동홍, 서홍리다. 위의 원도 중 5번, 6번, 9번, 10번의 상세 도면이 분리되어 기록되었는데 이를 다시 결합하면 아래 도면이 나온다.


1914년 전라남도 제주도 우면 서귀리 토지조사 원도/국가기록원


A구역 일본인 거주지

B구역 조선인 거주지

C구역 논沓, 밭田

D구역 조선시대 전통마을


붉은점 표시 : 대지 용도 필지(점의 크기는 필지 크기 표시)

녹색 : 도로

하늘색 : 구거(물길)


지적도를 참고해 보면 1914년 우면右面 서귀리西歸里는 현재 법정동 서귀동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북쪽은 일주동로, 서쪽은 솜반내, 동쪽는 동홍천을 경계로 한다. 그 중 솔동산마을 에 해당하는 서귀 3리는 일주도로(신작로)를 기준으로 남쪽에 해당된다. 1914년 기준으로 서귀3리(솔동산) 지역의 대지垈地는 솔동산(B지역) 중심으로 33필지와 포구주변(A지역)으로 17필지, 총 50필지다. 최소 50여 집들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대지가 밀집한 솔동산B 주변은 서귀진성이 폐지된 후 서홍과 동홍에서 분리, 조성된 조선인 촌락이 조성되었다. 포구 인근 A지역은 일본인이 정착한 거주지다. 푸른색으로 표시된 구거溝渠(수로)는 농경지인 C지역으로 흐르고 있다.


현재 정방동 지역인 일주도로 인근 D지역의 대지는 약 100필지다. 제주의 가옥형태가 안거리 밖거리 등 두 가구 이상으로 구성된 집의 비중이 높은 것을 감안한다면 최소 150에서 200호에 가까운 집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D 지역은 조선시대에 형성된 동홍과 서홍 등 전통마을로 추정된다. 그 외 북쪽지역은 논과 밭, 임야 등 농경지다. 광무 8년(1904년)조사된 풍덕리(서귀리) 통계보다 1914년 토지조사 시점에는 가구 및 인구 모두 최소한 1.5~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마을 성장으로 인한 인구 증가도 한 요인이겠지만 1904년 당시 조사에서 누락된 집들과 사람이 상당 수 추가 파악된 결과일 것이다.


1912년에서 1914년 사이에 건설된 일주도로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보기 드문 폭 6m의 큰 길로서 다른 도로와 비교해 크고 선명하다. 이 일주도로에서 남쪽 해안 방향으로 내려오는 두 갈래의 길(현 태평로, 천지연로 41번 길과 솔동산로)은 일제 강점기 서귀포의 지형도를 결정짓는 역할은 한다. 또한 동홍천(아린내 또는 애린내)과 정모시(보목동 북쪽 동홍천 상류에서 예전에 말에게 물을 먹였다는 뜻으로 모시물이라 함. 마수馬水 또는 모시馬牛물이라고도 함)에서 시작되어 동에서 서로 길게 흐르며 남쪽으로 지류를 낸 4개의 구거溝渠(물길) 또한 이 지적도의 특징 중 하나다.


첫 번째 길부터 살펴보자. 서쪽 천지연 교차로에서 시작되어 남으로 향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남쪽 급경사를 따라 천지-나가타長田-여관 가는 길(현재 천지연로41번길)이며 또 다른 하나는 완만하게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자구리로 향한다. (현재 솔동산 11번 길) 천지연로41번길과 솔동산로 사이에 형성된 조선인 마을(B 지역)은 아마도 서홍-걸매-에서 진성이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따라온 자연 마을로 보인다. 현재 나폴리 호텔 부근에 섰던 오일장은 일본인들의 정주상점과 다른 전통적 상업 형태에 가까웠을 것이다. 마을 입지도 천지연 하류와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급경사를 이루기 때문에 전통적인 어촌의 환경이라 볼 수는 없다. 좀 더 천지연로41번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완만한 경사에 해안에 인접한 일본인 마을(A 지역)과 만난다. 일본인 마을은 그들에게 익숙한 해안 지형에 들어섰다. 일본인 상인과 관료들이 지정 숙소로 사용했던 나가타長田여관(이후 천지여관)과 고지마小島여관(이후 정방여관)이 중요한 포인트다. 이들 여관에서 창문을 열면 포구와 익숙한 바다의 풍경이 펼쳐진다. 천지연로41번길은 두 여관 앞에서 마무리된다.


서귀포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주로 서귀포항 인근 해안가에 거주하며 상대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누렸다. 주로 관공서 직원이나 무역상, 밀감, 과수원,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사람, 고래공장과 해산물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어업분야도 일본인에게 우선 어획권이 있었기 때문에 소득이 높았다. 생선도 조선인은 일본인이 사고 남은 것이 있어야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차별이 심했다. 서귀포항 주변에는 일본인이 경영하고 이용하는 아오키靑木요정, 요시노吉野 요정 앞서 말한 두 여관이 있었다. 이 밖에도 잡화점, 식당, 당구장, 어구류 상점 등(나카무라 마따오中山虎吉상점, 사이고西鄕상점, 나카무라中村상점, 요시다吉田상점 등)과 우에다 요시마쓰植田壽松가 우에다植田의원에서 진료활동을 했다. 또한 1917년에는 서귀진성 터에 조선인들이 다녔던 서귀보통공립학교 보다 3년 먼저 일본인을 위한 서귀(남)공립심상소학교가 문을 열었다.


당시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전쟁 특수'가 발생해 1915년에서 1919년 간 연평균 7.9%에 이르는 가히 폭발적인 성장률을 보였고 쇼와昭和 금융공황인 1927년과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이전까지 연평균 3%의 성장세가 이어졌다. 이 같은 호황의 여파는 제주도와 서귀포까지 이어진다. 일본 내 노동력 특수는 결과적으로 제주도가 일본의 ‘노동력 공급시장’으로 전락하는 계기가 된다.


두 번째 길은 현재 솔동산 문화의 거리 입구 사거리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솔동산 네거리를 거쳐 천지여관과 항구까지 이어진 길, 현재의 솔동산로다. 첫 번째 자구리로 연결된 길과 교차하며 근대도시 서귀포의 거리 풍경을 만들었다. 솔동산로를 기준으로 서쪽은 시가지, 동쪽은 주로 농사를 짓는 전답이 조성되었다. 1930년대 이후 솔동산로 동쪽 지역에 서귀포보통공립학교와 제일전분공장과 소주양조공장이 들어서긴 했지만 대부분 논이나 밭이었다. 1948년 5월 촬영한 항공지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정모시에서 시작된 수로-구거溝渠-가 서쪽으로 흐르며 남쪽 방향으로 네 줄기 지류를 만든다. 한줄기는 서귀진성 집수정으로 모이고 다른 줄기는 소남머리로 흘러 도축장의 핏물을 씻어냈으며 나머지 줄기는 농사짓는데 쓰였다.


해방 이후 서귀포의 가장 뚜렷한 공간의 변화는 바다의 메우고 그 곳에 건설된 새로운 항구와 방파제였다. 일주도로와 항구를 연결하는 남북 직선도로, 부두로가 개통되었다. 이 길은 마을을 완만하게 돌아 굽이가 있는 길과는 다른 형태를 가졌다. 마을의 중심이었던 솔동산로는 부두로에 역할을 넘겨주었다. 서귀포항은 물류항으로 적극 개발되었다. 아마 이 시기에 송산동의 인구는 정점을 찍었을 것이다.(1985년 통계 8,612명)마을 동편 논과 밭이 택지로 변하며 집들이 들어섰고 농사짓는데 요긴하게 쓰였던 물길의 쓸모도 묘연해졌다.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70년대까지 마을을 가로지르던 정모시물을 마을 토박이들은 지금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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