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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호 Nov 05. 2020

S# 18 이재수의 난이 시작된 곳

- 서귀포성당

백이십 년간 서귀포에는 하루 세 번 종소리가 울려왔다. 종소리의 주인은 서귀포 성당이다. 색달에 사는 양용항(베드로)가 육지에서 세례를 받은 후 서귀포로 돌아와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이 1894년이다. 제주에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린 건 1899년 프랑스 선교사인 페네 Peynet와 보좌인 김원영(아우그스띠노) 신부가 파견되어 제주 본당을 설립하면서부터다. 특히 김원영 신부는 서귀포 하논(한논)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1900년 6월 12일에 라크루 신부와 김원영 신부가 설립한 한논본당(서귀포 호근동 194번지)이 바로 서귀포 성당의 모태가 되었다. 제주도에 세운 두 번째 천주교 교구였다.

호근동 194번지 한논본당 터

조선시대부터 무속 등 민간신앙이 발달한 제주에서 천주교는 필연적으로 지역사회와 마찰을 빚게 된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자가 바로 지난 S# 07 서귀진성은 언제 사라졌나? https://brunch.co.kr/@martis/10에서 잠깐 언급했던 봉세관封稅官 강봉헌姜鳳憲이다. 평안도 출신의 강봉헌은 천주교인을 고용해 갖 종류에 세금을 매겨 거둔다. 가옥 · 수목 · 가축 · 어장 · 어망 · 염분 · 노위 등의 세금은 물론, 심지어 잡초에까지 세금을 징수했다. 고종으로부터 '짐과 같이 여기라 如我待'는 어명을 배경으로 프랑스 선교사와 천주교도는 신목과 신당을 불태우고 도민들에게 금풍을 갈취하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끓어올랐다. 천주교인들의 만행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한 찰리사察理使 황기연의 보고서를 보면

* 살인, 부녀자 강간 및 강탈, 도둑질 등의 범죄를 저질러도 사람을 죽여도 관가에서 체포하지 못한다(교도들은 마음 내키는 대로 땅을 뺏고 이미 팔았던 땅을 다시 사들일 때도 시세가 올랐더라도 예전에 받은 돈만 치르고 우격다짐으로 되돌려 받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 교도들을 비방하거나 언쟁을 벌인 사람들을 "천주교를 모독했다"라며 성당에 끌어다가 매를 치거나 가두고, 관에서 체포한 사람을 천주교도라고 하여 도중에 빼돌리거나 관가의 감옥에 갇힌 사람을 강권으로 풀어주기도 한다.
* 제주도의 오래된 신당을 파괴하여 토속신앙을 유린했다.
- 《황성신문》 광무 5년 6월 21일 자
김원영 신부 /출처: 서귀포 성당

말 그대로 프랑스 신부들은 치외법권의 지위를 누렸으며 천주교도들의 범법 행위에 관리들은 방관했다. 양민 폭행 치사 사건이 바로 서귀포성당에서 벌어지고 '이재수의 난'이라고 알려진 신축 민란辛丑民亂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건은 강봉헌이 제주로 온 1900년 6월에 시작된다. 김원영 신부는 제주 남부인 하논에 본당을 설치하려 했으나 인근 마을 주민들이 반대하며 나섰다. 마을 주민들은 천구교당 반대하는 목패를 마을 입구에 세우고 제주 목사에 소장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이듬해인 1901년 2월 김원영 신부를 비롯한 40명의 교인들은 천주교당을 반대하는 마을 훈장이자 유지인 현유순 집에 들이닥쳤다. 천주교도들은 현유순과 오신락 노인을 잡아 서귀포 교단-하논본당-으로 끌고 가 폭행-고문이라는 주장도 있다-을 한다. 이 와중에 오신락 노인이 숨졌다. 대정 군수 채구석蔡龜錫은 오신락의 시신을 부검했고 폭행에 의한 타살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때 관노였던 이재수도 동행했다고 알려졌다.


이 부분에서 서귀포성당 측의 입장은 서로 엇갈린다. 오신락 노인이 폭행당한 것은 맞지만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했다고 주장한다. 양측 주장의 사실 관계를 떠나 이 사건은 불이 번지듯 일파만파 확대된다. 참다못한 제주도 유지들은 그 해 4월 천주교의 폐해와 부당한 세금에 저항하기 위해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한다. 상무사를 중심으로 폐해를 시정 건의가 제주목사에 전달되는 한편 민의를 모으기 위한 평화적 집회도 연다. 5월 천주교도들은 상무사의 지도자였던 오대현을 납치했다. 이재수가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일본인들에게 무기를 구입해 제주 내 성당을 불태우기에 이른다. 프랑스 신부들과 천주교도들은 제주성으로 도피했으나 관에서도 이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제주성으로 진입한 민군들은 악명이 높았던 천주교도 300인을 골라 참수했고 프랑스 신부 중 일부도 처형되었다.

프랑스 함선에서 찍은 당시 처형된 천주교도 시신

프랑스 측은 이를 빌미로 프랑스 군함 2척을 파병했다. 프랑스 함정을 타고 온 신임 목사 이재호, 찰리사 황기연은 방문을 내걸고 그때까지 남아 있던 군중 만 명을 달랜 뒤 해산시켰다. 6월 11일에는 민란의 지도자인 채구석ㆍ오대현ㆍ이재수 등 주모자들과 봉세관 강봉헌을 잡아들였다. 그것을 지켜본 민중들이 다시 모여 이재수의 석방을 요청했다. 그러나 진위병이 그들을 곧바로 압송하여 서울로 보냈다. 프랑스는 압송된 자들의 처벌과 피해 배상금을 요구했다. 재판이 열렸고 오대현ㆍ강우백ㆍ이재수 등 주모자들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영화 <이재수의 난> 포스터 1999년

한편 하논 본당(서귀포 성당)에는 김원영 신부의 후임으로 무세 Mousset (문제만 제르마노)가 2대 주임신부로 잠시 머물다 전출되었고 1902년 3대 타케 Taquet (엄택기 에밀리오)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한다. 부임 당시 신도 수는 137명에서 35명으로 신축 민란으로 인한 피해가 컸다.    


엄 타케 신부/ 출처 서귀포 성당

타케(嚴 에밀리오) 신부는 1902년 6월 17일 하논을 떠나 홍로洪爐(현 서홍동 면형의 집)로 이전했다. 1915년 재임까지 희생자 매장지와 배상금 문제, 끊이지 않은 갈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嚴 타케 신부는 식물학자로 왕벚나무 등의 제주 식물을 세계 식물학계에 보고하는 등 공로를 인정받아 현재 서귀포 성당 앞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1937년 8월 15일 서귀포 586번지(현 위치)로 본당을 이전하고 본격적인 서귀포 시대를 연다. 초기 신축 민란 등 교회의 흑 역사도 있었었으나 이후 교인이 옥고를 치르는 등 일제에 탄압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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