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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 어쩌면 좋을까요... ㅠㅠ

#창의성 죽이는 제도 교육 #내 아이가 ADHD라고??? #부모의 역할

IV. 창의성보다도 / 더 중요한 것!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약 20년 동안 집과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던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들에게 단순 암기식 정보만 머리 속에 밀어 넣는 데만 너무 열중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 아이들이 한창 나이인 30대에 맞을 특이점의 시대,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만한 무언가를 가르쳐야 한다면 그건 과연 무엇일까요?






학교가 창의성을 죽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혹평을 받아 온 민 군의 그림.


 

유럽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어느 가을 날, 학교에서 돌아온 민 군에게 엄마가 ‘오늘은 어땠는지’ 묻습니다.

 

아이는 부끄러운 듯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줍니다.

 

그림이 그려져 있네요. 엄마가 딱 보기에도 그리 잘 그린 그림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이 날 학교에서의 작품 활동은 아이가 하트 모양의 보드판을 들고 있는 밑그림에 친구들이 하나씩 서로에게 잘 맞는 칭찬의 말을 골라 붙여주면 자신이 마지막으로 색칠을 더해 완성하는 것이었대요.

 

 

‘넌 참 명랑해’, ‘넌 정말 예뻐’,

‘넌 그림을 잘 그려’, ‘넌 아는 것이 많아’,

‘우리 반을 위해 봉사해줘서 고마워’,

‘넌 정말 양보를 잘해’, ‘난 널 응원해’.

 

 

그런데 완성된 민이의 작품을 보고 선생님이 대놓고 ‘엉망진창’이라고 표현했다는군요.




언뜻 보면, 정말 덕지덕지 색을 칠해 놓은 것처럼 엉망으로 여겨질 수 있겠다 싶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꼭 그렇게 표현해야만 했을까, 참…’


“민이는 근데 왜 이렇게 색칠을 한 거야? 무슨 의도가 있어?”

 


엄마의 질문에 민 군이 천진한 얼굴로 답합니다.

 


“으응~ 친구들이 이렇게 다 다르게 칭찬해 줬잖아~ 그래서 하나하나 다 다르게 색을 칠해 주고 싶어서 이색 저색 덧칠해 보니까 이렇게 된 거지~ 원래 여러 색깔이 합쳐지면 검은 색처럼 돼~”

 


과연, 그렇다!

 

흔히 말하듯 무지개 색만 다양성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검정색에도 다양성이 숨어 있었던 거죠.

 

어른의 마음이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어요.



그런데 이런 일이 한 번만 있었던 게 아니에요.



초등학교 2학년 때 민 군의 그림.


 번은 민이가 ‘가을 느낌이 나게그린다며 얼굴과 머리카락을 알록달록 식물처럼 표현했나봐요.

 

그런데 선생님이 “얼굴을 살색으로 그려야지, 정신 없이 이게 뭐야!” 이렇게 꾸짖고, 기어이 친구가 붙여 칭찬 스티커까지 떼게 했다네요.

 

아니, 폐기 처분된 줄 알았던 인종차별적 ‘살색’ 타령도 그렇거니와 친구들 앞에서 그리 면박을 주는 게 과연 바람직한 교육법일까요?


아이가 이런 학교 생활을 견디며 지냈다는  너무 슬퍼졌어요.






교육학자 켄 로빈슨(Ken Robinson)의 유명한 테드(TED) 강연 ‘학교가 창의성을 죽인다?(Do schools kill creativity?)’ 동영상 캡쳐 이미지



“학교가 창의성을 죽이고 있다!”

 

영국 출신의 저명한 교육학자 켄 로빈슨(Ken Robinson, 1950~) 경이 이렇게 일갈한 바 있습니다.

 

2006년 ‘학교가 창의성을 죽인다? Do schools kill creativity?’라는 제목의 테드 토크TED Talk 강연에서 한 문제 제기인데요.

 

유명한 강연이지만 아직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여섯 살 짜리 학생이 평소 다른 수업에서는 거의 집중을 안 하는데 그림 수업에는 유독 열심이었대요. 선생님이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에게 ‘너 지금 뭘 그리니?’라고 물어봤더니 ‘신을 그리고 있어요’라고 하더래요. 선생님이 ‘하지만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도 모르잖아?’라고 하니까 이 아이의 답변이, ‘곧 알게 될 거에요~’”(웃음)

 


자기가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완성된 걸 보면 ‘곧 알게 될 거’라는 자신감에 찬 답변.

 

이렇듯 천진난만함으로 무장한 아이들은 결코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르더라도 일단 시도해 보는 거죠. 어른들처럼 잘못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아요.

 

물론 ‘실수하는 것’이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과 그대로 이어지는 똑같은 의미는 아니죠.

 

하지만 로빈슨 경이 지적했듯, 한 가지 확실한 건 “잘못하거나 실수해도 괜찮다는 마음이 없다면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아쉽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모습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뭔가 실수를 하지 않을까, 틀리거나 잘못되면 어떡하나 늘 걱정하며 사는 ‘어른’이 되는 거죠. 그런데 이게 과연 자연스런 생명의 법칙일까요?


아니, 그렇지 않아요!

 

100점 만점에 한 문제 틀리면 빨간 줄을 긋고 95점, 그런 교육 제도가 실수에 대한 좌절감과 죄책감을 움트게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틀렸다’거나 ‘실수’라는 것들이 어른들의 관점에서, 어른들이 정해 둔 규칙을 따르지 않은 대가로 딱지 붙여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결국 어른 관점의, 어른 중심의 교육이 창의성을 죽이고 있는 셈이죠.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 무라노 섬.




“모든 어린이들은 예술가로 태어난다. 하지만 자라면서 그 예술성을 유지시키는 것이 문제다.”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다지요?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님, 선생님과 ‘창살 없는 감옥’ 학교의 틈바구니 안에서 창의력이 계발되기는커녕, 있던 창의력도 빼앗기게 됩니다.

 

로빈슨 경이 ‘학교가 창의성을 죽인다’며 변화를 호소한 게 벌써 15년 전인데 지금 현실을 보면 딱히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는 게 더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세상 대부분의 교육 제도는 비슷한 과목 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학제 간 분명한 분리와 엄격한 위계 질서. 흔히 ‘국영수’라고 하듯 국어, 영어, 수학이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그 아래에 여러 인문학 과목들, 그리고 미술, 음악 등 예술과 체육은 맨 아래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팔과 다리, 마음보다 철저히 머리에만 집중하는, 즉 ‘머리 공부 능력’에만 치중하는 교육은 인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19세기 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공교육 제도조차 존재하지 않았죠.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이래로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교육 시스템은 규율에 길들여지고 산업 현장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군소리 없이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데 맞춰져 왔습니다.

 

국영수 중심으로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을 나와야 더 좋은 직업을 갖고, 조금이나마 나은 삶의 수준을 누릴 수 있다는 ‘약속’으로.

 

20세기만 해도 그런 어른들의 조언은 어느 정도는 맞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까요?


이미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석사,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넘쳐납니다. 이런 ‘교육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구하기는 과거보다 훨씬 어려워졌고요. 이제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것이 곧바로 ‘성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이 사회에 나와 일자리를 갖게 될 2040~50년 경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해 있을지 상상이 되시나요?

 

인공지능, 자율주행 등 신기술이 현재의 일자리 대부분을 없앨 수도 있다고 하는 미래를 여전히 과거와 같은 교육 방법으로 준비해도 좋은 걸까요?

 

물론 짧게는 당장 1, 2년 후, 5년 후, 10년 후 어떤 미래가 펼쳐질 지 알 수 없고, 믿을 구석이라고는 여전히 좋은 대학에 가는 것 말고는 도무지 생각할 수 없다는 데 많은 부모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리알토 다리Ponte di Rialto’에서 내다 본 세상. 베네치아는 괴테, 디킨스, 헤밍웨이 등 많은 작가, 예술가들이 찾아 커피를 즐기며 작품 활동을 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 역동성, 독특성이라는 특징이 이미 미래 각광받을 인재상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조금은 다른 길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모두가 국영수만 팔 것이 아니라 아이마다 남다른 재능을 알아봐주고 각자 그 재능을 살려 미래 자신의 행복한 삶을 준비할 수 있도록지원해 주는 것 말입니다.






앞서 소개한 켄 로빈슨 경의 강연 중 이어지는 이야기.

 

1930년대 영국, 한 초등학교 아이의 부모가 학교로부터 “댁의 아이에게 학습장애가 있는 것 같다”는 통지문을 받습니다. 수업 중 안절부절 집중을 못 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나요.

 

당시에는 그런 개념조차 없었지만 요즘 흔히 ADHD주의결핍 과잉행동 장애라고 말하는, 그런 경우였던가봐요.

 

학교의 권유에 따라 의사를 찾아갔는데, 그래봐야 숙제 좀 늦게 해 가고, 다른 친구들 조금 귀찮게 하는 여덟 살 아이에게 무슨 그렇게나 큰 문제가 있었겠어요.

 

20여 분 상담을 해 보던 의사가 그 아이에게 다가가 “잠깐 어머님과 따로 얘기를 나누어야 될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려 줄래?” 하고서 어머니와 함께 방을 나갔어요.

 

방을 나서면서 책상 위에 있던 라디오를 켜고 음악이 흘러 나오게 해 두었죠.

 

밖으로 나온 의사는 아이 어머니에게 말했어요.


“잠깐 여기서 따님을 관찰해 보세요.”

 



방 안을 들여다보니 아이가 일어나서 음악에 따라 몸을 움직여 리듬을 타고 있는 거에요.

 

의사가 말했습니다.


“어머님, 이 아이는 문제아가 아닙니다. 타고난 댄서인 거지요. 이 아이를 댄스 학교에 보내 주세요.”

 


이후 아이는 부모님의 후원으로 춤을 배우는 전문 학교를 거쳐 왕립 발레 학교까지 들어가 무용 분야에서 훌륭한 커리어를 쌓게 됩니다.

 

이게 누구 이야기냐고요?


 

훗날 뮤지컬의 거장 앤드루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 1948~)를 만나 <오페라의 유령>, <캣츠>와 같은 어마어마한 작품들의 안무를 책임지게 된 질리안 린(Gillian Lynne, 1926~2018)입니다.


어린 시절 그의 남다른 특성과 잠재성을 잘 알아봐 준 그 의사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질리안은 어떻게 됐을까요?


                                                      

<오페라의 유령>, <캐츠> 등 수많은 뮤지컬 대작의 안무를 책임진 질리안 린. (이미지 출처: 캐츠 공식 홈페이지 등 인터넷 사진)






“여러분. 일곱 살의 셰익스피어, 상상이 되세요? 하지만 그에게도 일곱 살 시절이 있었을 테고, 누군가의 영어 수업을 들었겠죠. (선생님은) 얼마나 짜증 났을까요?(웃음) 아버지는 ‘그런 투로 좀 말하지 마, 알아 들을 수가 없잖니!’, ‘빨리 가서 자!’ 이렇게 잔소리에, 호통도 쳤을 거고요.”(ㅋㅋㅋㅋㅋ)

 


로빈슨 경의 이 말은 우리 아이들의 교육이 얼마나 어른들 중심으로만, 어른들의 잣대로만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풍자입니다.

 

학교에서든 집에서든, 이런 잘못된 교육 제도가 아이들의 창의성을 갉아먹는 주범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특정 학교나 교사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어쩌면 우리 어른들이 미래의 셰익스피어, 피카소, 아인슈타인에게 어른들의 잣대로 맞다, 틀리다 재단하고, 잔소리를 하고 호통을 치며, 아이들의 잠재성이 꽃 피기도 전에 무참히 짓밟아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민이는 참 독창적이고 섬세한 아이 같아요!”
 

 

민 군이 3학년에 오르고 첫 학부모 면담에 갔을 때 민이 엄마가 새로 만난 담임 선생님께 들은 말이었어요.

 

학교 생활에서 몇 번의 실망스럽고 걱정되는 경험을 한 이후 ‘정말 학교를 옮겨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도 했더랬습니다.

 

피부를 ‘살색’으로 칠하지 않았다고 혼을 내는 식이 아니라 아이를 있는 그대로 잘 들여다 봐 주려 하시고, 기왕이면 좋은 점을 찾아 긍정적으로 독려해 주시는 좋은 선생님과 한 해를 함께하게 됐다는 게얼마나 안심이 되던지요.




‘물의 도시’ 베네치아 하루 숙소로 묵은 작은 호텔, 카운터를 지키는 개와 함께. 유리 세공 기념품 가게에 진열된 ‘흘러 내리는 시계’.







150년 동안 그대로인 학교


 

베네치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 ‘부라노Burano’ 섬.

 

                                                 

 

‘나는 막 학교 시스템을 고소했습니다! I just sued the school system!


 

몇 년 전, 약 6분짜리 짧은 동영상 하나가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 영상에는 판사와 배심원단 앞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학교를 비판하는 한 남성이 등장하는데요.

 

첫 장면은 어항에 든 금붕어를 들고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천재라고. 하지만 물고기를 나무에 오를 수 있는 능력으로 판단한다면, 그 물고기는 자기 일생 내내 스스로가 멍청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배심원단 여러분, 오늘 우리는 현대 교육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와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저들은 물고기를 나무에 오르라고 하는 것뿐 아니라, 땅 위에서 10마일을 뛰라고 합니다. 교육청 종사자 여러분, 대답해 주십시오. 당신은 당신들이 한 일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십니까? 수만 명의 사람들을 로봇으로 만드는 것이 재미있나요?”




‘I just sued the school system!’ 유튜브 영상 캡쳐 이미지

 

그는 이어서 150년 전의 전화기와 현재의 전화기, 150년 전과 현재의 차의 모습을 사진으로 비교해 보여주죠.

 

너무나 큰 150년 동안의 변화상… 이윽고 나타나는 150년 전 학교 교실의 모습.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구식 전화기가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말이 끌던 마차가 슈퍼카로 바뀌는 동안, 놀랍게도 지금의 교실은 150년 전의 모습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겁니다.

 

 

“기존 교육 시스템으로는 미래에 꼭 필요한 창의성과 사고력, 이를 논리적으로 개념화할 수 있는 언어 능력을 습득하기가 어렵다. (이대로라면) 2030년에는 세계 대학의 절반이 사라지고 전통적인 학교에 종말이 찾아올 것이다.”


- 토마스 프레이(Thomas Frey, 1944~), 미국의 미래학자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교육만큼 더디게 변하는 영역이 있을까요?

 

기술 발달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변화 속도는 너무나 빠른데 이를 교육할 학교는 여전히 고리타분한 과거에 머물고 있는 거죠.

 

‘교육’ 하면 대단히 미래지향적으로 들릴 지 모르지만 사실은 ‘군대보다도 더 보수적인 곳’이 학교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왜 그럴까요?




베네치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 ‘무라노Murano’ 섬. 섬에서 만난 외국 꼬마 동생과 잠깐 축구공 놀이. 부라노가 색색깔깔 무지개라면, 무라노는 차분한 파스텔 톤이다.

 


생각해 보세요.

 

수십 년 간 기존의 교육 시스템에 따라 교육을 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 앞장선 분들이 교장, 교감이 됩니다. 정년을 앞둔 노년의 선생님이 초등학교 저학년 담임을 맡아요.

 

물론, 오랜 경험에서 오는 지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개별 선생님 한 분, 한 분을 따로 보면 ‘지금 우리가 21세기를 살고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구시대적 성향을 보이는 분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죠.

 

초등학교 2학년, 학생 하나의 연필, 지우개가 없어진 일을 두고 반 아이들 전체를 추궁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의 기대와는 달리 끝끝내 ‘범인’(?)이 자백하고 나서지 않자 ‘피해자’(?)학생에게 다른 친구들이 하나씩 순서대로 다가와 ‘미안해~’ 하고 사과하도록 만들고, 반성문까지 쓰게 하는 일이 21세기 오늘의 학교에서 벌어집니다.

 

 

“엄마, 왜 미안하지도 않은데 사과를 하고,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반성문을 써야 해?”

 

집에 돌아온 아이는 답답함을 토로합니다.



아홉 살 아이도 아는 자명한 이치인데… 옛날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권위적이고 고리타분한 선생님이 그에 반하는 언행을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겪은 일로 마음 고생 안 해 본 학부모가 있을까요?


물론, 학교에서는 학교의 법에 따라야죠. 하지만, 뭔가 아니다 싶을 때는 문제 제기를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를 보고도 ‘내 아이만 눈 밖에 날까’ 걱정돼 말 한 번 속 시원히 못 해보고 그냥 넘길 때가 적지 않습니다.



베네치아 부라노 섬에서 만난 아이들과 달리기 놀이.






“서툰 외과의사는 한 번에 한 명을 해치지만 서툰 교사는 130명을 해친다.” A poor surgeon hurts one person at a time; a poor teacher hurts 130.

 

 

미국의 교육학자 어니스트 보이어(Ernest L. Boyer, 1928~1995)의 말입니다.

 

이 ‘서툰 교사’라는 말이 가르치는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교육 철학이나 방식, 태도에 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교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기존의 교육 시스템을 더욱 견고하게 유지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어요.

 

물론 의욕 넘치는 젊은 선생님들 중에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는 분들도 없는 건 아니지만 결국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랄까요?

 


고등 교육으로 올라갈수록 더 답답해 집니다. 입시 교육의 폐해를 이야기한 지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가 나온 것이 1989년이에요.

 

대학 입학을 위한 주입식 교육에만 매달리던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지금도 본질적으로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내용뿐 아니라 형식 측면도 마찬가집니다.

 

2020년 1학기, 코로나19로 개학이 오래도록 미뤄지면서 온라인, 원격 교육이 큰 화두가 되었지요. 앞으로는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 등 첨단 디지털 IT 기술이 교육에 적용되면서 학습이 더 이상 교실에만 머물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미 세계 여러 대학이 교육에서의 평등과 개방성을 기치로 대규모 온라인 공개 수업MOOC, Massive Open Online Course을 실험해 왔지만 언제, 어디서나 접근 가능한 ‘맞춤형 교육’의 시대가 이번 코로나19를 계기로 더욱 앞당겨질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구글 등 IT 기업들이 제공하는 VR, AR앱으로 우리 집 안방에서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구경할 수 있어요.

 

물론 당장은 직접 가서 보는 것보다 훨씬 못하겠지만 그 생생함은 앞으로 점점 더 현실에 가까워질 겁니다.

 

인터넷 검색과 온라인 교육이 가능한 시대,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학교나 교사, 가정과 부모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물론, 얼굴을 맞대고 직접 소통하면서 진행하는 교육이 다 쓸모가 없어질 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기술이 변화시킬 교육의 새로운 모습을 이해하고 미래 교육과 그 안에서의 각 교육 주체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거죠.


 

현재와 같은 형식과 내용의 교육이라면, 그 폐해에 대해 좀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유일한 역할은 어쩌면 ‘아이에게 되도록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하지만 ‘늑대 젖으로 키워지지 않는 이상’ 부모든 선생님이든 어떤 어른으로부터도 아이가 영향을 받지 않게끔 할 도리는 없죠.

 

현재의 학교 시스템에서 받는 부정적 영향이 있다면 다른 한편(제도 교육의 바깥)에서 더 열심히 만회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도 교육이 창의성을 희미하게 하는 쪽이라면 반대쪽으로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 더 노력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명의 현명한 부모는 백 명의 교사보다 낫다.”


- 요한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Johann Friedrich Herbart, 1776~1841),독일의 철학자, 교육학자




베네치아에서 잠시 배를 타고 다녀 온 색색깔깔 부라노 섬.







노는 것과 할 일은 해야 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이 생긴 민 군 ㅎㅎ 류민 군 3학년 때 일기.



노는 것과 할 일은 해야 하는 현실 사이의 고민


다른 아이들과 비슷하게 나에게도 고민이 생겼다.

바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해야 할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배우는 양이 많아진다. 그렇다면 숙제의 양도 많아진다. 숙제의 양이 많아지면, 시간이 많이 든다. 시간이 많이 들면 할 일 다 못 끝낸다. 못 끝내면 밀리고 밀리고 점점 할 것이 많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다.

두 번째 이유는 1, 2학년 때는 수학, 국어, 체육이 있었다. 이것만 해도 조금만 힘들었다. 하지만 3학년 때는 수학, 국어, 체육, 과학, 사회, 미술, 음악, 도덕, 창체, 영어가 되었다. 너무 힘들다. 그리고 숙제도 많아진다.

세 번째 이유는 미래를 생각하면 4, 5, 6학년 3년이 남았다. 또 중, 고, 대학교는 어떨까? 4, 5, 6학년 때는 배우는 게 어려울 것이고 중, 고 대학교는 시험 대비 연습 또 연습 놀 시간 없이 계속 공부만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엄마, 아빠도 자주 못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민이 있는 것이다. 지식은 쌓아야 하지만 놀기도 해야 된다. 그래야지 어움을 좋아해서 비타민 D가 없어서 맨날 히어로에게 지는 악당 꼴을 보기 싫다면 놀기도 해야 한다. (그렇지만 해야할 일은 하는 게 좋다.)


2019년 10월 27일 류민의 일기



‘문 리버’가 흐르는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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