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의 함정 #내 아이에 딱 맞는 교육 #특이점이 온다 #미래 인재상
외관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150년 간 크게 변하지 않은 학교 교육 시스템은 사실, 인류의 장대한 역사 전체로 보면 결코 오랜 기간 유지되어 온 철칙이 아닙니다. 특정 몇몇 나라, 장소에만 국한된 일도 아니죠.
『사피엔스』(김영사, 2015), 『호모 데우스』(김영사, 2017)로 유명한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교수는 후속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김영사, 2018)에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우리는 교육에서도 생산라인 이론을 물려받았다. 마을 중간에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이 있는데, 그 안은 똑같이 생긴 수많은 방으로 나뉘어 있고 각각의 방에는 책걸상이 줄지어 놓여 있다.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자신과 같은 해에 태어난 다른 아이들 30명과 함께 이 교실들 중 한 곳으로 간다. 매시간 어떤 어른이 교실로 걸어 들어와서는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들은 정부로부터 보수를 받는다. 그들 중 한 명은 지구의 형태에 관해 이야기하고, 다른 한 명은 인류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한다. 세 번째 사람은 인간의 신체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런 교육 모델을 비웃기는 쉽다. 그리고 이 모델이 과거에는 성취가 어떠했든 이제는 파산했다는 데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쓸 만한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50분 일하고, 10분 쉬고’를 반복하는 일터의 법칙, 종이 울리면 들어가 자리에 앉고, 권위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학교 교실에서부터 일찌감치부터 훈련 받아 왔죠.
물론, 선생님 한 분이 50~60명을 관리해야 했던 40~50년 전보다 지금의 학교는 한결 나아진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한한 잠재성을 가진 아이들을 바보, 문제아로 내모는 ‘평균의 함정’은 여전히 학교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말재주가 좋고, 어떤 아이는 눈치가 빠르고, 어떤 아이는 암기력이 좋다거나, 숫자에 재능을 보인다거나, 아니면 미술, 음악에서 소질을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학교에서는 이런 다양성을 무시하고 단지 연령별 평균 지능이라는 잣대로 학습 과목과 난이도를 정해 두고 몇 번의 테스트로 아이들의 능력을 재단해 버립니다.
학생 개개인의 고유한 재능을 발견해 더 발전하도록 돕고 하는 것은 더 이상 학교에서 기대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 일정(로마-피렌체-베네치아)을 마치고 오스트리아(잘츠부르크-빈)로 향하는 밤기차. 한 달 유럽 여행 중 유일하게 ‘숙박 시설’이 아닌 ‘이동 수단’에서 고단한 밤잠을 잔 날.
맹자의 <공손추公孫丑>에 ‘알묘조장揠苗助長’이라는 고사가 나옵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일을 더 심해지도록 부추긴다는 의미의 ‘조장하다’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는데요. 춘추전국시대, 자기 벼가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덜 자란 것처럼 보여 마음이 초조해진 송 나라의 한 농부가 벼의 순을 억지로 뽑아 들어올려 결국 싹이 모두 말라 죽게 만들었다는 어리석은 일화입니다.
눈에는 띄지 않았어도 곡식은 차근차근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농부는 억지로 싹을 당겨 올려 성장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만 안달하는 마음, 서두르는 마음에 오히려 농사를 다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같은 10살이라고 해도 지적 능력이 똑같지는 않아요. 아이마다 어떤 분야에서는 느리고, 또 어떤 분야에서는 빠를 수 있죠.
하지만 지금의 학교 교육 시스템에서는 ‘10살이기 때문에’, ‘3학년이기 때문에’ 그 교과 과정을 따라가야만 하고, 그 기준으로만 평가를 받게 됩니다. 와중에 어떤 아이들은 평균에 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게으름뱅이’, ‘문제아’, ‘한심한 녀석’으로 취급 받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어디 꼭 그렇던가요? 학교에서는 인정받지 못했던 우리 친구들이 나중에 더 잘 된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보죠.
자신만의 ‘고유한 재능’을 발견해 스스로 발전시켜 나갔기 때문입니다.
‘평균주의’는 근대의 산물입니다.
19세기, 20세기에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고 산업화 시대의 틀을 다지며 더 많은 부를 창출하는 바탕이 됐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가도 따랐죠. 개개인의 가치와 특성, 잠재력을 억압하고 개인의 존엄성마저 상실케 했습니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였어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시대 시작된 근대 학교 교육이 전후 산업화와 경제 성장에 기여한 측면도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처럼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되어준 것도 교육이었고, 가난했던만큼 세계 다른 어느 나라보다 높은 교육열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죠.
하지만 21세기는 더 이상 그렇게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산업화 시대의 문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의 특기와 장점을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사회 발전이 좌우되는 세상으로 진입했습니다.
- 토드 로즈(Todd Rose, 1974~),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교수,『평균의 종말』(21세기북스, 2018) 저자
우리 부모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기적 관점에서는 교육 정책의 바람직한 변화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만한 좋은 교육 정책을 펴 줄 정당과 정치인, 교육감을 선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하루 아침에 오지 않죠. 당장 내 아이는 4학년이 되고,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고, 영어, 수학, 과학을 공부해야 할 테니까요.
학교 바깥에서 부모가 더 큰 역할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제도 교육에 뿌리 깊이 스며들어 있는 평균주의의 함정에서 우리 부모들부터 의식적으로 빠져나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식의 표준화된 교과 과정의 획일적 기준에서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나이의 아이라고 해서 똑같은 지능이나 인지적 발달 수준을 보이지는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해요.
하나를 잘 한다고 모두 잘 하는 게 아니에요. 더 느긋하게 아이를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잘하는 걸 찾아 더 잘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됩니다.
제도 교육의 틀을 과감히 박차고 나와 홈스쿨링Home Schooling으로 자녀를 직접 교육하는 어느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요.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학습하는 데 있어 더 잘 받아들이도록 발달된 감각 기능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예를 들어 누구는 시각보다는 청각, 또 다른 누구는 청각보다는 촉각, 그런 식으로 더 강점을 보이는 학습법이 있다는 거죠.
어떤 아이는 활자화된 텍스트를 보며 공부할 때는 매우 잘 하지만 선생님이든 누군가가 앞에서 설명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힘들어 할 수 있다는 거에요.
또, 어떤 아이는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경험해야 직성이 풀리고 그 과정에서 학습이 더 잘 되는 경우도 있고요.
논리력과 사고력을 요하는 교과목에는 영 소질이 없거나 관심 자체가 없지만 다른 과목에서는 눈빛이 반짝이는 아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앞에 소개한 안무가 질리안 린처럼 말이죠.
민 군만 해도 어려서부터 눈에 띄는 특징이 있었어요.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 10~20여 명이 함께하는 수업에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보다 항상 저 뒤로 빠지려 들더라고요.
“저요~ 저요~” 하며 적극적으로 손을 들고 선생님의 관심을 차지하고 제 할 말을 적극적으로 하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항상 뒤로 젖혀지는 느낌이랄까요?
처음에는 “너는 왜 다른 친구들처럼 저렇게 못하냐”며 “너도 앞에 앉아서 대답도 크게 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해 보라”고 다그쳐도 보고 했지만…
근데 그게 아니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민이는 소규모로 2~4명 모여 진행하는 수업이나 활동에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거에요.
그제야 깨달았죠.
말하자면, 민이는 일종의 ‘소수정예’ 스타일로 진행되는 소규모 교육 활동에 더 적성이 맞고, 그 안에서 더 빛을 발하는 아이였던 거지요.
학교 시스템은 그런 아이들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아요. 공장식으로 일원화된 체계 하에 무조건 따라오게 만들고, 따라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낙오자, 문제아로 낙인 찍는 거죠.
정규 교과 과정에 맞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아이들을 교사 한 명이 모두 맞춤형으로 챙겨주기도 어려운 노릇이고요.
하지만 문제는 문제입니다. 과거에도 변하지 않았고, 다가올 미래에도 바뀔 것 같지 않기 때문이죠.
교육 강국으로 불리는 핀란드의 경우 우리에 비해 학생들이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나 수업량이 훨씬 적어요. 숙제도 거의 없고, 경쟁보다는 협력을 중심에 두죠. 그럼에도 핀란드의 교육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힙니다.
2009년 보건복지부가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조사, 발표한 ‘아동·청소년의 생활 패턴에 관한 국제 비교 연구’에 따르면 2003년 기준으로 한국의 15~24세 청소년이 학교, 학원, 집에서 공부하는 시간은 하루 평균 ‘7시간 50분’. 조사 대상인 30개 OECD 국가 학생들의 평균 공부 시간인 ‘5시간 전후’보다 3시간 가까이 길게 나타났습니다. 1주일 기준으로 보면 15시간이나 더 긴 것이죠.
다른 OECD 국가의 경우 일본 청소년은 하루 5시간 21분, 독일의 경우 5시간 2분, 영국은 3시간 49분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사교육에도 훨씬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는데요. OECD의 ‘2012 PISA 학업성취도 국제 비교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학생들의 사교육 참여 시간 평균은 ‘주당 3.6시간’. OECD 회원국 평균인 ‘36분’과 비교하면 큰 차이입니다. 점수가 가장 높다는 핀란드의 사교육 시간은 주당 불과 ‘6분’밖에 되지 않았고요.
그렇다고 우리가 거둔 성과가 특별히 좋았을까요?
한국 청소년들은 주당 8시간 55분을 수학에 할애할 만큼 열을 쏟았지만 PISA의 수학 성적(2003)은 542점이었습니다. 반면, 수학 공부를 한국의 청소년들의 절반 수준인 1주일에 4시간 22분만 하는 핀란드 학생은 544점이었습니다.
시간 대비 성적의 효율성을 따져보면 한국이 핀란드의 절반 수준. 무조건 공부하는 시간이 많다고 잘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죠.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학교 공부와 사교육에 시간을 쏟아 붓고도 아이들의 성적은 크게 뛰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행복 지수’만 떨어트리죠.
다들 말로는 ‘교육 혁명’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정말 혁명이라는 말에 걸맞을 정도로 다 뜯어고치지 않는 한 의미 있는 변화는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 가지의 규격화된 모범 답안만 강요하는 ‘평균주의’와 ‘획일화’의 교육 체제, 숨막히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허덕이는 게 안타까워 제도권 교육을 벗어나 대안을 찾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대다수 부모들은 다수가 가지 않는 ‘소수자의 길’을 걷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쉽게 엄두를 못내죠.
그래서 어떡하면 좋을까요?
‘잘츠부르크 뮤지엄Salzburg Museum’에 들어갔다가 아직 대중에 공개하지 않고 있는 걸작을 만났다. 한스 마카르트Hans Makart의 <봄>Der Frühling. 어쩌다 뮤지엄 지하로 이어진 통로를 따라갔는데, 아직 정식 개장 전 며칠 후 공개를 준비 중인 커다란 작품이 하나 걸려 있었다. ‘봄을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에 오스트리아 말로 적힌 작품명을 얼른 구글로 번역해 보니 역시 ‘봄’이라는 뜻.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서 본 보티첼리의 <봄>과는 비슷한 듯 사뭇 다른 느낌. 민 군과 함께 작가 한스 마카르트에 대해 조금 더 찾아봤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스승이자, 그가 롤 모델로 삼았던 화가라고 한다. 클림트와의 연관성에 새삼 달리 보인다. 클림트는 이제 곧 빈에서 만나게 될 터다.
제도 교육을 아예 걷어찰 용기가 없다면, 결국 그 폐해를 상쇄하고, 보완하고, 대신해 줄 무언가를 학교 바깥에서 찾아야 하는 수밖에 없겠죠.
나의 의미, 내 삶의 의미, 내 인생에서 바라는 것, 그리고 행복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알 수 있는 것. 특히나 변화의 속도 속에서도 그걸 붙들고 있으면 든든한 키가 되고 나침반이 될 것.
부모가 나서 아이와 함께 과외 활동에서 그런 소중한 것들을 찾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책도 있고, 영화도 있고, 다양한 교재, 교보재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이 여정의 ‘가이드’ 역할을 해 줄 사람, 즉 부모의 역할입니다.
민 군은 한 달, 정확히는 5주에 걸친 이번 유럽 여행을 위해 몇 주를 결석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학교를 다니던 1980-90년대만 해도 ‘의무 교육’이 그야말로 ‘의무’ 교육이었죠.
학교를 빠진다는 건 어디 다리가 부러지거나, 무슨 정말 큰 일이 아닌 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죠.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 스스로 아이의 학교 생활에 대해 그런 마음가짐을 버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번 여행을 계기로 하루도 빠짐 없이 반드시 ‘개근’을 해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보다는 ‘학교 안에서 배울 것’과 ‘학교 밖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의 맞교환trade-off이 가져다 주는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아이와 더 많이 놀고, 더 많이 대화하고,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함께 찾아 나가고, 그 재능과 취향을 더 크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교 공부만 잘한다고 성공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창의력이 높은 아이들을 20년 동안 가둬놓고 허구한 날 똑같은 공부만 시키는 것은 ‘죄악’입니다.
나중에 아이로부터 정말 큰 원망을 들을 수도 있어요.
학교에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한 달 가족여행 출발할 때만 해도 마음 한 구석에 있던 결석에 대한 죄책감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기업 조직의 홍보・커뮤니케이션 담당자로서 CEO 메시지, 기고문 등을 준비하다 보면 ‘급변하는’이란 형용사를 참 많이 쓰게 됩니다.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너무 상투적인 말이라 피하려 해도,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말이겠죠. ‘급변하는’이라는 한 마디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누군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1520년에서 2020년까지의 500년의 변화보다 2020년에서 2070년까지의 50년의 변화가 훨씬 가파를 것이다.”
그냥 속도가 아닌 ‘가속도acceleration’인 것이죠.
그렇게 변화는 상수가 됐고, 이 세계와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게 될 거에요.
그리고 다가올 이 엄청난 변화들은 어른들에게도 남은 삶을 대비하는 데 큰 도전이 되겠지만, 이제 막 걸음을 떼는 우리 아이들에게는 더욱 어마어마한 파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앞으로 10~20년 후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가늠해 보려면 현재의 세계가 과거 100년 전, 200년 전에 비해 얼마나,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면 됩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게 250년 전, 최초의 칼라TV가 나온 게 불과 100년도 안 됐습니다.
이제는 그것 없이는 절대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인터넷이 대중에게 보급되기 시작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하시나요? 1990년대 후반, 지금으로부터 불과 20년 전의 일입니다.
모바일 혁명을 불러일으킨 스마트폰의 등장은 2008년, 겨우 10여 년 정도 전의 일입니다.
앞으로 자율주행 로봇이 배달해 주는 음식이나 상품을 받고, 유명 셰프의 레시피를 다운받아 요리 로봇이 해 준 음식을 즐기는 세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게 20년 후일까요, 30년 후일까요? 변화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어쩌면 5년, 10년 안쪽일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겪으며 ‘온라인 수업’은 좋든 싫든 따를 수밖에 없는 유일한 방법이 되고 말았죠. 코로나 위기를 벗어나면 온라인 교육은 다시 없던 일이 될까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의 발전 속도는 더 무섭습니다.
현재 기술력으로도 인공지능의 생각 회로는 우리 뇌의 그것보다 100만 배나 빠르다고 하죠.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인간지능을 뛰어넘는 시점’.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국제연합UN의 보고서를 비롯해 세계의 여러 미래학자들은 이 특이점이 오는 시기를 대략 2045년 정도로 보고 있어요. 앞으로 25년밖에 안 남았습니다. 2010년 태어난 민 군은 2045년이면 35세가 되네요.
물론, 20-30년 후의 미래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 자신 있게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장 내일, 아니 5분 후도 모르겠는걸요? ^^;
분명한 건 ‘지금과는 확연히 변해 있을 것’이라는 점. ‘변한다는 것’이 유일한 진실인 시대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배우는 지식의 대부분은 2045년 경이면 별 소용이 없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약 20년 동안 집과 학교에서 배운 것입시 공부, 대학 전공으로 평생을 먹고 살 수 있던 시대는 이미 끝났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들의 머리 속에 단순 암기식 정보만 밀어 넣으려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 아이들이 한창 나이인 30대에 맞을 특이점의 시대,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만한 무언가를 가르쳐야 한다면 그건 과연 무엇일까요?
-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 신경과학자,『창조하는 뇌』 저자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창의적인 뇌의 비밀> The Creative Brain 중
알아야 할 것만 같은 것들이 넘쳐납니다.
‘정보의 물결’, 아니 이쯤 되면 ‘정보의 쓰나미’ 수준입니다.
이 표현이 언제 처음 나왔나 문득 궁금해 졌습니다. 포털에서 ‘뉴스 검색’으로 살펴보니, 2001년 말부터 나타나네요. ‘정보화 물결’이라는 비슷한 말이 1990년에 조회되긴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30년 전에도 이미 그랬지만, 인터넷을 필두로 한 IT 네트워크의 발달에 따라 정보는 더욱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듯 보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젠 온갖 잘못된 정보와 가짜 뉴스fake news, 그 외에도 수많은 의미 없고, 하찮은 것들까지 우리를 유혹하며 주의를 분산시키고 있지요.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머리에 쑤셔 넣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도 ‘옥석’을 가려낼 수 있는 안목, 눈썰미, 종합적인 상황 판단 능력과 분석적, 비판적 사고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그야말로 불필요한 것은 가려내고 버리고, 정말 중요한 것에만 집중하는 ‘선택과 집중’이 필수인 시대!
아이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라’,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라’ 말로는 그렇게 떠들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식과 정보, 데이터를 머리에 욱여 넣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10대, 20대를 지나 어른이 되어서까지 가짜 뉴스에 휘둘리거나 선정적인 19금 영상에 눈이 돌아가고, 연예인의 신변 잡기, 고양이, 강아지가 출연하는 동영상에 의미 없이 시선을 빼앗기고 시간을 허비하게 하기보다,
자신의 삶에 있어 좀 더 의미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스스로 행복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면 무엇을, 어떻게 교육하면 좋을까요?
유발 하라리는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중 ‘교육’을 다루는 부분에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앞으로 30년 후, 2045~50년 경이 되면 변화의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는 데다 인간의 기대 수명까지 길어지면서 19세기, 20세기의 전통적인 교육 모델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핀란드는 이런 미래에 대비해 이미 오래 전부터 나라의 교육 과정을 4C 역량 중심으로 전면 개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4C’란, 많은 전문가가 미래의 인재상으로 꼽는
비판적 사고 Critical thinking,
의사소통 Communication,
협력 Collaboration,
창의성 Creativity
을 뜻합니다.
요즘 많은 전문가들이 손꼽는 것들이죠.
그런데 비판적 사고나 의사소통, 협력, 창의성, 이런 역량들은 단순히 ‘암기’하려 한다고 해서 쉽게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지요.
책이나 영화, 공연을 보거나 여행을 하며 알게 된 것, 느낀 점을 되새겨 보고 또, 다른 사람과 나눠 보고.
친구들과 함께 무언가를 같이 하는 가운데 때로는 다투고, 또 협동하면서 공동의 결과물을 내 보기도 하고.
남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설득도 해 보고.
직접 손으로 흙을 만져보고, 곤충과 꽃들을 관찰해 보고 말과 글로, 그림, 음악, 춤으로 표현해 보고…
그렇게 단순한 지식의 암기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것도 스스로, 빠르게 학습할 수 있는 능력,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에 대처하고, 낯선 상황에서도 정신적, 심리적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이의 미래를 위해 중요합니다.
오스트리아의 천재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1862~1918)와의 첫 대면. 우리가 여행하던 2018년 당시, 빈은 클림트 서거 100주년을 맞아 그야말로 ‘클림트의, 클림트에 의한, 클림트를 위한’ 도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온통 클림트로 가득했다.
빈의 ‘레오폴드 미술관Leopold Museum’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어 코코슈카 등 3대 화가의 작품이 많다. 특히 실레의 컬렉션은 세계에서 가장 큰 거라고. 우리가 이 곳을 찾았을 때도 마침 클림트와 실레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런 질문에 대해 끊임 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할 수 있는 ‘사유’하는 힘, ‘철학’하는 힘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
독일 출신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무지는 용서할 수 있어도, 무사유는 용서할 수 없다’며 무사유, 즉 생각하지 않음을 ‘범죄’라고까지 했지요.
‘홀로코스트’라는 20세기 인류 최대의 비극을 만들어낸 건 무지, 즉 지식이 없거나 몰라서가 아니라, 사유가 없어서였다는 지적.
우리 교육은 인터넷만 뒤지면 금방 나오는 단순 지식을 쌓도록 하고 테스트 하는 데 급급합니다. 지식은 많을지 몰라도 비판적인 사유 능력은 없는 공장에서 찍어낸 상품같은 인간을 길러내는 데 초점이 맞춰진 거지요. 사유하고, 철학하는 학생은 열등생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선다는 시기가 코앞인 지금, 여전히 그런 교육에 매달리는 게 바람직한 길일까요?
외부, 환경에 틀 지워진 대로가 아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으로 우리 아이들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엽기적인 사건들, 멘탈 붕괴, 분노 조절 장애, 타인에 대한 배려의 부재, 생명 경시…
이런 무서운 세상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고, 살아 남기 위해서라도 자존감과 탄력 회복성으로 ‘정신줄’ 똑바로 잡고, ‘멘탈’ 챙겨서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행복을 도모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게 좋은 대학 보내겠다고 학교로, 학원으로 뺑뺑이를 돌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입니다.
-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