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대한 소유권을 주창하는 직접 민주주의
맑스의 철학 이론에 다가갈 때는 굉장히 첨예하고 세밀하게 다가가야 합니다. 특히나 한국에서는 공동체(코뮌)와 노동에 대한 탄압을 기반으로 발전한 한국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 때문에 공동체주의, 특히 맑스는 거의 폐기된 채 연명하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한국의 맑스 철학의 대가 끊겨가고 있어요. 전체적으로 사회철학이 죽은 분위기이고 맑스를 전공하시는 지성인 분들이 다들 경제학으로 전공하신 분들이셔서 맑스의 철학적 깊이를 논하기에 한국은 그 단초들이 굉장히 부족한 나라입니다.
맑스는 공산주의로 잘 알려져 있죠. 하지만 이것이 현재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세계지도 속에 그려진 공산주의와는 명백히 다르다는 점을 명시하셔야 합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공산주의의 모습은 국가의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인민대중들에게 자유의 권한이 부여되지 않은 모습입니다. 북한이나 러시아, 중국이나 쿠바만 봐도 알 수 있죠.
이러한 공산주의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독재’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맑스가 주장한 공산주의는 이런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고 오히려 자본주의보다 더 민주주의에 가깝게 밀접해 있습니다.
맑시즘의 문제 중 하나는 정치관이 굉장히 희박하다는 거에요. 맑스의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저서 『자본』 이 완결되지 못한 채 맑스가 숨을 거두었기에 그의 사상 전체가 미완결로 남아있죠. 만약 맑스가 조금 더 살았더라면 그의 정치철학이 완결된 채로 ‘완성형 철학자’의 반열에 올랐을 가능성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저는 그의 철학이 미완결이기에 더욱이 현재적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의 정치철학 담론인 공산주의에 대해 살펴보려면 여기저기 편재해 있는 조각들을 한 데 모으는 작업이 필요한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저작이 바로 후기에 기술된 『고타강령비판』 입니다. 여기서도 맑스는 자신의 공산주의가 독재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어요.
『고타강령비판』 에서 맑스는 “국가는 국민들의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라고 기술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산주의와는 벌써 많이 다르죠. 맑스는 국가와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에게 있어 국가는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그에 걸맞는 국가를 정초한다’는 이론이었기에 국가가 국민들에게 법과 제도를 공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법과 제도를 직접 공표하고 국가에게 이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맑스는 공산주의의 가장 성숙한 국면에 들어서는 국가와 종교과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는 아나키스트로 전향합니다.
이런 이론이 도출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맑스의 공산주의에선 각각의 개인들의 유적 능력(인간의 보편적인 무한한 능력)을 인정하고 그 다양성을 인정하기 때문이에요. 그의 저작들에서는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초기 저작인 『공산당 선언』 또한 정당 강령이 아닌 ‘사회의 모순에 끊임없이 반기를 드는 운동’의 행동 강령으로 기술됩니다.
공산주의라는 단어 대신 맑스는 ‘자유인들의 연합체’ ‘연합된 자유인들의 모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전공 지식으로 들어가자면 이게 바로 ‘어소시에이션’이에요. 『자본』 에서도 ’연합된 자유인들‘의 개념이 여기 저기 흩뿌려져 있습니다. 그 조각들을 모아서 바라보면 그저 자유인들의 공동체 느낌에 가깝습니다.
이런 자유인들의 연합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바로 노동을 내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진정한 여가를 누리는 것이에요. 분업으로 미분화된 자본주의식 생산 과정에서는 노동의 과정과 결과가 온전히 나의 것으로 정립하지 못 합니다. 예컨대 볼펜이나 아이패드의 생산 과정을 일반인들은 잘 모르잖아요. 맑스 입장에서는 그게 말이 안되는 겁니다. 그건 한 기업이나 한 사람의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지닌 무한한 능력”의 산물이라는 거에요. 공산주의는 궁극적으로 그것이 가능한 공동체를 지목합니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전공 수준으로 깊이 있게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맑스의 저작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그걸 혼자 읽는다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요. 여러 문학적 비유들과 선배 학자들의 개념들을 자기의 것으로 인용해서 사용하기에 헤겔의 여러 테제들도 알고 있어야 하고 포이어바흐나 국민경제학자들의 개념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맑스를 온전히 이해하는데에는 굉장히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중적으로 오명을 쓰고 있는 맑스의 공산주의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업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생각하지만, 희미해져가는 한국의 맑시즘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맑스의 공산주의는 두 개로 나눌 수 있어요. 초기 저작 특히 『공산당 선언』이나 『독일 이데올로기』 에서 보여준 공산주의는 ‘현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응하는 운동’으로 소개되고, 『자본』 을 거치며 『고타강령비판』 에 도달하며 후기에는 그것이 정치철학적 목적으로 전환되어 미래 사회를 그리는 개념으로 자리합니다.
맑스의 공산주의는 국가가 대중들을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독재와 전체주의의 개념이 아니라 개인들이 행하는 노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여가의 자유를 보장하며 그러한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으로 정치를 가져오는 것 입니다. 다시 말해 대중들이 정치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죠. 일상생활 속에서 불편함과 불필요함을 느끼는 법과 제도들을 의식적으로 고쳐나가는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 맑스는 국민들의 의식 수준과 문화 수준이 고양되어야 함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특정 국가의 수준은 그 국민들의 의식 수준과 동일합니다. 우리에겐 우리가 바라는 국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맑스 공산주의 이론의 귀결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