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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호 Jun 03. 2024

나는 책상에 놓여진 저 물컵을 알지 못한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몇 몇 있어요. 그 중에서도 전공자와 비전공자 모두에게 넘어야 할 하나의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는 인물이 바로 칸트에요. 칸트가 중요한 이유는 이전의 이성중심적 사고인 ‘합리주의’와 감각중심적 사고인 ‘경험주의’를 한 데 통합하여 새로운 인식론적 방법을 제시했다는 데에 있고 칸트 본인 스스로 이런 전회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러요.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을 기각하고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지동설을 제출한 인물이잖아요. 칸트의 전회는 온 세상의 법칙을 뒤바꾼 코페르니쿠스처럼 외부사물을 인지할 때 우리가 그 사물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우리에게 가져온다라는 거에요.

 쉽게 말해 외부 사물의 본질 그 자체는 모른다는거고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물자체(Ding an sich) 이론이에요. 칸트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선험적 인식 형식이 인식한 대상이라는점에서 이전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요. 이전 철학자들은 사물에 대해 탐구를 할 때 그것이 우리에게 드러난 방식인 ‘현상’이 아닌 ‘사물 그 자체’의 본질을 찾고 싶어 안달나있었는데, 칸트가 봤을땐 그건 절대 찾을 수 없고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거죠.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보통 우리가 책상 위에 놓인 물컵을 인식할 때 칸트 이전 철학자들은 우리의 의식을 저 물컵에 맞춰서 물컵의 본질을 찾으려 했어요. 하지만 칸트는 이렇게 말해요. 저 물컵이 물컵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드러난 현상이 물컵으로 보이기 때문이지 물컵 이면에 저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모른다라는 거에요.

 쉽게 말하면 물컵은 물컵 이전에 물컵이 아닐 수도 있다 이거에요. 그것을 우리가 물컵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사물이 지니는 고유한 속성이 그것을 물컵임을 지목하고 있어서인게 아니라 우리의 감성적 직관(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틀)과 오성(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12범주의 틀)이 저걸 ‘물컵’이라고 호명한다는거죠.


 다시 말해 우리는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요. 우리는 직관과 오성을 통해서 그걸 “아 저기 무언가가 있구나, 근데 저게 뭐지?”하고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배열을 통해 직관이 ’대상화’ 하는 작업을 거쳐 12범주 틀을 지닌 오성이 그것을 “음 이렇게 생긴건 물컵이군”이라고 ‘개념화’한다는 거에요.

 우리는 우리의 인식 원칙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인식에 의해 대상화되어 있고 개념화 되어 있고 구조화 되어 있어요. 칸트는 이를 통해서 ‘신’ ‘초월자’ ‘본질’에 대한 이성적 탐구는 완전한 허상임을 지목해요. 이성의 역할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것들은 우리 이성의 영역을 너무나도 초월해 있기에 인간으로서는 절대 알 수 없다는 거죠.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바로 우리가 개념화 작업을 통해 우리에게 현상으로 드러난 ‘아이패드’ ‘나무’ ‘볼펜’ ‘강아지’ 등과 같은 저 개념 덩어리들이라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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