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성차공식
오늘은 정신분석학의 세계로 가볼까 해요. 정신분석학은 오스트리아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창시한 학문 분과인데, 프로이트의 문제 의식은 ‘무의식’을 통해 해부학적으로 정신질환에 접근하는 것이었어요. 이 과정에서 굉장히 리비도적인 서술로 젠더사회에서는 여전히 논란이 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의 탐독은 근현대 유럽, 특히나 프랑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요.
특히 소쉬르의 언어철학을 차용하여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 주장한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구조주의를 차용하여 프로이트의 리비도적 해석을 지양하고 프로이트와는 다른 결로 내담자를 대합니다.
프로이트가 히스테리를 호소하는 내담자를 현실계의 아버지의 언어로 그 욕망의 결함을 봉합하려 한다면 라캉의 경우는 프로이트의 이런 아버지 담론을 내담자의 치료에 적용시키지 않습니다. 라캉은 오히려 각각의 내담자들의 구체적인 상황과 히스테리를 인정하고 주이상스라고 불리는 죽음 충동, 즉 금지된 것을 원하는 바로 그 충동에 강력한 힘이 있음을 인지해요.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와 라캉의 전제는 여성이 남성보다 히스테리를 더 잘 일으킨다는거에요. 이들이 여성들을 향해 내뱉은 엄청난 말들이 있어요. 대표적으로 프로이트는 여성을 가리켜 ‘검은 대륙’이라 칭해요. 몇십년의 연구 끝에 그는 여성이란 밝혀질 수 없고 밝혀지지도 않는 미지한 존재라고 결론을 내린거에요. 라캉의 경우 그 악랄한 테제가 있죠. 바로 “여성은 해부학적으로 열등하다.” “여성은 남성의 증상이다.”라는 테제요.
라캉이 쏘아올린 여성 담론은 엄청난 논란을 가져와요. 여성철학 진영에서는 라캉의 저런 말을 두고 “여성의 문제는 우리 여성이 다뤄야 한다.” “남자가 여성의 문제에 대해 무엇을 아느냐.“ 등의 담론들이 오가기도 하고 일각에선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을 토대로 하나의 페미니즘 조류를 만들어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현재 4세대 페미니즘이 이런 라캉의 성차공식을 토대로 두고 있다 바라보는데, 라캉이 여성을 두고 행한 작업이 바로 프로이트가 검은 대륙이라 제출했던 여성의 존재론적 지위를 밝힌거거든요.
여전히 활발히 활동중인 3세대 여성철학자 주디스 버틀러 같은 경우 젠더 문제를 호명하죠.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생물학적 성별인 sex와 사회적 성별인 gender가 결국엔 동일하다는거에요. 왜냐하면 너는 남성이야, 너는 여성이야 하는 생물학적 결정은 사회적 관습과 의례에 따라, 즉 gender에 따라 고착화 된 관념이라는 거에요. 우리가 남성과 여성을 의식하는 방식은 사회의 여러 개념들이 이런 행위나 사유가 남성적인 것이고 저런 행위나 사유는 여성적인 것이라고 지목하는 것이고 결국 생물학적 성별인 sex 또한 여성을 여성이게 하고 남성을 남성이게 하는 역사적 구안물의 산물임을 무시할 수 없다는 거죠.
이런 버틀러의 섹스-젠더 이론도 라캉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앞서 라캉의 악랄한 명제 있죠. 거기서 라캉은 여성은 ”해부학적으로“ 열등하다고 말해요. ”생물학적으로“가 아니라 ”해부학적으로“요. 즉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여성은 이성애적 가부장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든 소수자들을 의미하기도 해요.
라캉의 성차공식에 들어가기에 앞서 욕망이론에 대해 간략히 알아 둘 필요가 있어요. ‘상상계’ ‘상징계’ ‘주이상스’라고 불리는 각각의 세계가 있어요. 주이상스는 죽음충동과도 동일하게 치환되고요, 이는 바로 에덴의 동산이에요. 우리의 원초적 쾌락과 욕망의 세계인거죠. 주이상스의 지평에서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그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들은 아버지의 강력한 법 아래 ‘거세’되어요.
다시 말해 주이상스에서 향유하던 주체는 가부장적인 세계(아버지의 법이 군림하는 세계)인 상징계로 들어오며 ‘거세’를 당해요. 쉽게 말해 주체성을 잃는다는 거죠. 이렇게 거세되어 상징계로 진입한 주체는 이제 자신의 욕망을 곧장 욕망할 수 없어요. 이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려면 아버지가 허락한 담론들 내에서, 아버지의 언어 안에서 그 욕망을 표출해야 해요.
그래서 등장한게 상상계에요. 상상계는 우리의 원초적 욕망이 필터링화되어서 우리 세계가 허락하는 방식으로 자리한 또 다른 욕망의 세계에요. 주이상스가 진실된 욕망의 세계라면 상상계는 변형된 욕망의 세계인거죠.
상징계를 호명하는 가장 절대적인 법이 ‘아버지’라고 했잖아요. 성차공식으로 넘어가면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남성들은 보편적인 주체를 가질 수 있다는 거에요. 그렇기에 남성들은 상징계에서 굉장히 자유로워요. 다른 말로 하면 남성들은 그 존재의 보증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미분화되고 분열되고 소외되는 주체가 아니라는 거에요.
하지만 상징계에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아요. 다시 말해 여성들의 시적점은 바로 거세에서부터라는 거에요. 어머니가 부재한 여성들은 보편적 여성성을 지닐 수 없기에 언제나 소외되고 미끄러지고 분열되고 말아요. 이게 여성이 남성보다 히스테리를 더욱 잘 일으킨다는 거고요. 그게 또 무슨 뜻이냐면 여성은 상상계가 아니라 주이상스와 직접적으로 관계한다는거에요. 보편화된 여성인 어머니가 없기에 이들은 상징계에 잘 길들여지지 않거든요.
라캉 정신분석학적으로 말하면 여성들은 the woman이 될 수 없는 거에요. 어머니라는 존재가 없기에 개별적인 여성인 woman을 한 데 묶어 보편화 할 the라는 관사가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라캉은 여성을 칭할 때 언제나 the woman, 즉 ‘빗금쳐진 주체’라고 칭하기도 해요.
아까 프로이트와 라캉의 다른 점이 프로이트는 히스테리를 부리는 주체를 아버지의 언어로 봉합하려 한다 했죠. 라캉은 이 히스테리에서 엄청난 힘을 인지한다고 했고요. 히스테리라는게 상징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빗금쳐진 주체가 일으키는 신경질적 신체화 증상을 말하는데, 이런 증상을 여성들이 더욱 잘 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여성들은 주이상스와 직접적으로 관계하거든요.
주이상스에 다가가서 원초적 쾌락과 욕망을 느끼고 이걸 상징계로 필터링 없이 그대로 가져오는거에요. 그러니까 자신의 욕망과 쾌락들이 이미 필터링 된 방식으로 자리한 정상적 주체들의 눈에는 이게 이상해 보이는 거고요.
이게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이냐면, 여성들은 주이상스의 특권을 지닌다는 거에요. 주이상스는 감히 남성들이 탐하지도 못하고 가질 수도 없는 여성들만의 특권이자 희열이에요.
4세대 페미니즘은 이 점을 정치경제학적으로 활용해요. 이들은 이전의 페미니즘이 너무나도 성급한 여성들의 남성화를 하려 했다 비판하며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언제나 미끄러지는 여성상을 강조해요. 여성이 해부학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기에 여성들만이 지닌 주이상스의 특권을 취하는 거에요. 주이상스에는 상징계에 균열을 낼 엄청난 힘이 있거든요.
라캉은 프로이트처럼 주이상스, 죽음충동을 부정하지 않았기에 그의 윤리학적 귀결점도 주이상스의 지평에 가장 가까이 도달하여 새로운 언표의 행진을 도출하는거에요. 주이상스가 지닌 막강한 힘으로 상징계에 균열을 내고 상징계를 초월하여 나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주이상스에서 내가 느끼는 가장 더럽고 추잡한 원초적인 욕망들과 쾌락들은 인정하고 수용해줘야해요. 가장 최악의 나, 부정적인 나를 포용하고 받아들이라고 라캉은 지목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