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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호 Jun 22. 2024

정치 없는 현대사회

아렌트의 현대사회 비판

 현대 지성사에 굵직한 인물들이 몇몇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프랑스 철학자 푸코와 독일 출신 유태계 철학자 아렌트를 논외시하고는 현대가 설명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아렌트는 나치정권 하에 행해진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데, 당시 나치 정권 하에 있던 독일에서 많은 유태계 학자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택하죠. 아렌트도 이 당시 미국 망명길에 오른 학자 중 한 명이었어요.

 난민, 무국적자의 삶을 살아가며 아렌트의 철학적 담론들을 이러한 문제들을 논하고 있어요. 예컨대 인권이란 무엇이고 전체주의는 어떻게 탄생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이요. 전반적으로 정치경제학, 사회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기에 우리는 아렌트를 여성철학자가 아니라 일반철학자로 분류하죠. 특히나 『인간의 조건』에서는 현대 사회 비판에 대한 그 유명한 담론들이 대거 나옵니다.


 아렌트는 현대 사회의 문제적 양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로 눈을 돌려요.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아렌트의 해석이 펼쳐지는데, 우선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에는 폴리스(정치의 영역)와 오이코스(경제의 영역) 구분이 명확했다고 지목합니다.

 오이코스는 가정을 뜻하는 단어로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고 필연적인 행위들이 이뤄지는 곳을 뜻해요. 여기에는 경제 생활도 포함되어 여기서 바로 현재 ‘경제’라는 단어를 지칭하는 ‘오이코노미아oikonomia'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에 따르면 재화를 습득하는 것은 가장의 몫이고 재화를 관리하는 것은 아내의 몫이다.) 즉 오이코스는 가정경제를 뜻해요.

 반면에 폴리스는 생존과 필연의 영역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각인들이, 자유로운 남성들이, 아고라에 모여 더 좋은 공동체를 위한 논의들과 정치적 행위들을 행하는 곳이에요. 폴리스는 생존에 얽매여 있지 않기에 자유로우며 여기서 오이코스의 얘기, 즉 사적인 가정사나 경제사의 얘기를 꺼내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로마제국과 같은 대제국이 등장하며 더 많은 인민들과 그들의 공동체를 수월히 관리하기 위해 정치방식이 바뀌었어요. 바로 국가 집단 전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인데, 여기서부터 오이코스의 영역이 폴리스에 있어 우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즉, 오이코스적 국가의 등장이에요.

 고대 그리스에서는 지극히 사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이던 경제가 이제 정치의 영역으로 흘러들어가 공통의 이해관계를 위한 집단과 연합이 형성되고 아렌트는 이런 현상을 사회라고 불렀어요. 이 사회에서 필연 즉 경제를 제외하고 자유(정치)를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죠.

 그렇기에 아렌트는 현대 사회에 정치가 부재한다고 해석 한 것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칭했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zōon politika)'라는 테제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테제로 전환되는 순간인 동시에 생존과 필연을 위해 행해지는 노동(labour)이 전범위적으로 확대된 것이 바로 (현대)사회상이죠.


 현대사회에는 인간 활동의 세 가지 양태도 하나로 포섭돼요. 아렌트는 생존을 위해 행해지는 반복적인 행위인 ‘노동(labour)', 이를 뛰어넘어 더 좋은 삶을 위해 행해지는 지속적이고 직선적인 행위인 ’작업(work)', 이 둘 모두와는 다른 인간의 판단과 의지가 투영된 자유로운 활동인 ‘행위(action)'이 모두 반복적이고 필연적인 노동에 종속되었다는 거에요.

 작업 활동을 하는 장인은 사라지고 공장이 일반화되며 대량생산의 노동의 영역으로 포섭된 자본주의의 성숙과정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렇게 작업이 노동으로 포섭되고, 그렇기에 인간의 자유적 행위 중 말을 통해 하는 행위인 정치 또한 노동에 관한 협소한 논의로밖에 잔류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죠. 한 마디로 현대 사회는 노동 예찬의 사회로 변화하였다는 맑스의 논의를 차용해요.


 이러한 현대 사회의 문제적 증상들을 극복하기 위해 아렌트는 다시금 고대 그리스로 눈을 돌려요. 아렌트가 보기에는 고대 사회처럼 정치의 영역의 복고를 통해 이런 사회 관계망을 지연시키고 무화시켜야 한다는거죠. 아렌트는 자유롭고 다양한 개인들을 담지자로 하여 서로 상호관계를 맺는 공동체를 재생산해야한다는 거에요.

 전쟁은 말logos이 없는 금수들이 하는 폭력적 행위이고, 인간 존재인 우리는 logos를 지닌 객체이기에 이를 통해 정치를 행해야 한다는 것이 아렌트의 탐독인데, 이러한 아렌트의 이론에 있어 그가 직접민주주의를 제창한 것이 아니냐라는 해석도 나옵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다라는 해석과 그렇지 않다라는 해석이 공존하고 있어서 명확히 말하기가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도 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렌트가 맑스의 정치경제학적 견해를 많은 부분 차용했다고 느껴져요. 맑스의 ‘자유인들의 연합체’나 이를 토대로 이룩한 ’사회민주주의(공산주의라고 알고있는 바로 그것)‘의 테제들이 아렌트에게서도 비슷하게 읽히거든요. 반면에 맑스와 비교해 보았을 때 아렌트는 노동을 굉장히 협소한 의미로 이해하고 있죠.

 맑스에게 있어 노동은 인간의 활동 전반이에요. 작곡하는 것도 노동이고 공부하는 것도 노동이고 일하는 것, 정치, 경제활동, 집안일을 포함한 육아나 여가를 위한 활동까지 이 모든 것이 맑스에게 있어서는 노동이지만 아렌트는 ‘반복적이고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활동’만을 노동으로 칭하죠.

  

 더욱이 아렌트에게 가해지는 가장 강력한 비판 중에 하나가 고대 그리스 폴리스를 너무나도 극명하고 이분법적으로 분계했다는 거에요. 이미 고대 그리스 당시에도 아고라에서 행해지는 폴리스, 즉 정치적 활동,이 외수(外需)에 의해 무너지며 그 분계가 명확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아렌트의 탐독이 유효한 것은 고대 아테네 만큼 민주주의가 만개 했던 공동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거고 그것이 가능성의 근저에는 분명 오이코스를 배제한 폴리스의 영역이 존재했고 그것이 활발하게 작동했다는 점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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