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나산 고수 춘차(古樹 春茶) 시음 기록
매년 운남성 보이차 투어를 갔는데 코로나-19로 인해 2년째 갈 수가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중국의 보이차는 구(古) 육대차산과 신(新) 육대차산으로 구분하는데, 남나산(南糯山)은 신육대차산에 속한다. 운남성 보이차 다큐멘터리에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차산이 남나산으로 제갈량의 전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운남성 서쌍판납주(西双版纳傣族自治州) 경홍시(景洪市)에서 맹해(勐海)지역으로 가는 214번 국도를 따라 40분 정도를 가면, 큰 고개를 넘어 바로 금구(金殏) 전통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남노산으로 가는 큰 문이 반긴다. 사륜 차가 겨우 지나갈 꾸불꾸불한 좁은 도로가 8Km를 30분 정도 올라가면, 10가구 정도가 거주하는 반파채(半坡寨)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남나산 차산의 마을은 해발 1,400∼1,700m에서 고차수가 생산되는 죽림채(竹林寨), 반파채(半坡寨), 고랑채(姑娘寨), 석두채(石頭寨), 아구 신채(牙口新寨) 등 30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남나(南糯)는 태족어(傣族語)로 ‘절인 죽순’이란 뜻이다. 남나 지명(南糯地名)의 유래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어느 해 태족(傣族)의 토사가 남나산을 순찰하러 방문했다. 합니족(哈尼族) 족장은 토사의 연회를 위해 산에서 나오는 야생 멧돼지, 사냥한 새고기, 산에서 나오는 나물 요리, 절인 죽순 요리 등 성대하게 준비했다. 토사는 연회에 나온 음식 중에 절인 죽순을 맛있게 먹은 후에 매년 공물로 절인 죽순을 보낼 것을 당부했다. 해마다 절인 죽순을 토사에게 보낸 것이 유래가 되어 ‘남노산(南糯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에도 남나산에 가면 울창한 대나무밭이 우거져 있으며 죽순 요리가 유명하다.
남노산 차산은 차나무 수령이 500년 이상 된 고차수(古茶樹)가 무려 12,000그루, 수령 800년 이상 된 고차수도 50그루가 되므로 고차수의 보고(寶庫)이다. 그러나 과거의 명성보다는 많이 쇠퇴하였지만, 아직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많은 보이차 애호가들이 지리적으로 쉽게 방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차 역사에 거슬러 올라가면, 남나산은 수천 년 전 고대 복인(濮人)이 처음으로 차 나무를 심었고, 다시 합니족(哈尼族)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차 나무를 재배하고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곳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복인과 합니족의 후예들은 자신들이 신(神)으로 모시고 있는 제갈량(諸葛亮)이 남나산에 차 나무를 심었다는 전설을 믿고 차조(茶祖)로 제갈량을 모시고 있는 것은 소원이며, 전설이다. 그러므로, 수령 800년이 된 차 나무는 제갈량이 심은 원조(元祖) 차나무로 신성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해 오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촉(蜀) 나라 때에 유비(劉備)의 군사(軍師)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펼쳐 삼국시대를 전개한 제갈량이 남쪽을 정벌할 때 남나산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병사들이 아열대성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눈병이 생겨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눈병에 걸린 병사들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자, 제갈량이 자신이 갖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꽂자 차 나무로 변했으며, 차 나무에 찻잎이 돋아났다. 병사들은 그 찻잎을 끓여 마시고 난 후에 기적처럼 완쾌되었다. 이 전설로 인해서 남나산 지역의 소수민족은 남나산을 제갈량의 호를 빌려 공명산(孔明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역사서를 보면, 제갈량은 남중(南中)을 정복할 때 남부지역인 운남(雲南)까지 오지 않았다. 매년 봄이 되면 봄차(春茶)를 따기 이전에 제갈량에게 제사를 지냈고, 춘차를 따서 처음 만든 보이차를 제갈량에게 바치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다.
실제로 남나산의 차왕수로 불렀던 수령 800년의 지름이 1.38m인 재배형 고차수가 존재했다. 1994년에 차왕수가 고사하면서 주민들의 실망이 극에 달하였지만, 우연히 차왕수로부터 2m 떨어진 곳에는 큰 차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고, 차왕수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 후, 남나산 반파채(半坡寨)의 주민들은 남나산 보이차를 많이 팔고, 신성시하기 위해 마케팅 차원에서 차왕수라고 불렀다. 남나산 보이차 투어를 오는 사람들에게 차왕수라고 소개하면서 자연스럽게 제갈공명이 지팡이로 땅에 꽂은 차왕수로 알려지게 되었고, 보이차 다큐멘터리나 뉴스에도 제갈공명이 심은 차 나무로 소개되어 유명세를 탔다.
한편 우리나라 다도문화(茶道文化)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부산 차인들이 다성(茶星)으로 모시는 금당 최규용(錦堂 崔圭用) 선생은 일찍이 남나산의 차왕수를 찾았으며,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술회 한 바 있다. 저자도 반파채(半坡寨) 마을에서 산속으로 걸어가는 산 중턱에 고차수 차나무밭이 이어졌고, 40분 정도 갔을 때 작은 움막집과 흐르는 맑은 개울물 소리가 나는 곳에서 제갈량이 심었다는 차왕수를 보는 순간 신성하게 느껴지고 겸손해졌다.
청나라가 쇠하고 장개석 국민정부의 지방공무원이 의방(倚邦) 지역을 통치하면서, 부정부패뿐만 아니라 많은 세금을 징수하여 소수민족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기낙산(基諾山)에 사는 소수민족 기낙족(基諾族)이 의방을 침입한 후에 불을 질러 의방 마을은 황폐화되었고, 풍토병이 돌면서 소수민족이 맹해 지역으로 이주하여 남나산이 급부상하였다.
현재 남나산에는 교목 고수차, 왜화고수차, 대지차의 3종류의 차 나무가 공존하며, 떼루아는 평균 해발이 1,400∼1,700m로 연간강우량은 1,500~1,750mm이며, 연평균 기온은 16~18℃이다. 운무가 끼는 날이 연평균 221일에 달하기 때문에 차나무의 생장에 유리한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
남나산의 소수민족은 봄에 어린잎을 따서 만든 춘차 고수차는 외부에 비싼 가격에 판매하고, 황편(보이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큰 찻잎을 골라내어 만든 것)이나 혹은 다 자란 찻잎을 따서 대나무 통에 넣어서 만든 죽통 보이차를 즐겨 마신다. 남나산 고차수 차산은 넓게 분포되어 있어 마을의 보이차 맛에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외형이 비교적 길고 단단하게 말려있고, 찻물 색이 금황색을 띠며 맑고, 찻물의 구조감도 풍부하며, 쓴맛은 약하고 회감이 비교적 빠르고, 떫은맛은 쓴맛보다 더 오래 지속되며, 침이 고여 나오고, 향기는 꽃 향, 난초향, 장향, 밀향 등이 느껴지며, 산야 기운이 비교적 좋다.
대표
필자는 매년 남나산 차산을 방문했는데, 차왕수가 있는 곳에 차를 마시던 전통 오두막집이 사라지고 새롭게 단장한 건축물에 크게 실망했다. 졸졸 흘러내리는 작은 계곡물도 모두 파헤쳐 아름다운 모습도 사라졌다.
차왕수를 보고 내려오는 길에 합니족이 사는 전통 가옥에 들어가 2019년 남나산 고수 춘차(古樹 春茶)를 접대받았다. 차산의 어느 집이든 들어가서 차를 마실 수 있는 후한 인심이 매우 인상적이다. 보이차를 시음 해보니, 외형은 검고 밝으며 단단하게 말려있어 야생적인 풍채를 느꼈다.
찻물 색은 금황색이며, 맑고 투명하다. 산야 기운이 비교적 강하며, 여행 중에 쌓였던 스트레스는 사라지고 맑은 기운이 느껴진다. 차향은 순수하고, 난초, 단향 등이 올라오며, 찻잔에 남아 있는 밀랍 잔향이 오랫동안 입안에 머문다. 맛은 쓴맛이 약하고 회감이 조금 빠르고 오래 지속되며, 떫은맛은 조금 길게 지속되지만, 떫은맛이 없어진 후, 바로 입안에 침이 고이고, 매끄럽고 부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