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부터 도망치는 길이었다. 몰래 비행기표를 사두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아주 잠깐 동안만 자리를 비우려고 계획했다.'어떠한 이유에서 그랬다'라는 정확한 설명은 못하겠다. 그냥 지쳤으니까. 현실을 뒤로한 채 제삼자의 입장이 되어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고, 누군가의 자식도, 누군가의 엄마도 아닌 오롯한 나 혼자만의 여행을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삶의 답답증이 가실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 순간 여행은 내가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만 하는 숙제 같았다. 살다 보면 그런 거 있지 않나? 그 문제만 풀린다면, 그 문제를 풀어낼 기회를 가질 수만 있다면 세상 모든 게 원활히 돌아갈 것만 같은 확신. 내 인생도, 타인의 인생도.
그러한 이유로 나는 집을 탈출하고자 했다. 식구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혼자서 차분히. 그러던 어느 날 치밀하지 못한 내 덜렁이 성격 때문에 혼자 여행을 가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식구들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혼자 떠나겠다는 꿈을 진행하고자 도망갈 구멍을 만들었지만 눈치 빠른 우리 집 노약자 세 사람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고 심지어는 틈 사이를 바락바락 비집고 들어왔다. 어찌나 의지들이 강하던지... 털어내려 노력했음에도 그들은... 털리지 않았다.
막강한 흡착력으로 내 인생에 쫀쫀하게 달라붙어버린 세 노약자는 결국 '혼자 하는 욜로 여행'이라는 내 꿈을 산산조각 내버렸고 '삼대가 함께하는 욜로 여행'이라는 세기의 짬뽕 여행을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이 여행기에 등장하는 사람은 총 네 명.
아버지: 은퇴 후 개밥의 도토리 마냥 식구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존재. 하루 세끼를 먹기 위해선 그 어떤 위험도 불사르겠다는 투철한 의지를 갖은 우리 집 삼식이.
어머니:모든 식구가 의지하다 못해 치대는 집안의 큰 나무 같은 존재.'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얻은 뒤 남편에게 '황혼 이혼'이라는 큰 선물을 주고 싶어 하는 우리 집 해결사.
손녀딸:할머니 할아버지라는 막강한 후원자를 등에 업고 집안 서열 1위를 꿈꾸는 괘씸스러운 존재. 눈치가 빠르고 나대는 성격 때문에 나의 혈압을 들었다 올렸다 하지만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애교 덕분에 등짝 스매 씽은 면하는 미취학 어린이.
나: 지극히 철저한 개인주의자. 그렇기 때문에 집안에서 무의 존재가 되고픈 정 없는 존재. 하지만 어쩌다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친정 합가 라이프를 살다 신경쇠약에 걸린 아줌마. 집구석 탈출 계획을 아빠에게 들켜 얼떨결에 삼대가 함께하는 여행을 주도하게 된 짐꾼이자 노예.
이렇게 전혀 어울릴 것 없는 네 사람이 4개국 네 도시를 오랫동안 여행하며 자주 위태롭게, 종종 감동적이게 사건사고를 겪다 결국 동시대를 살아가는 친구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이곳에 적히게 된다. 철저한 개인주의자인 줄 알고 살아온 나라는 사람이 삼대가 함께하는 여행을 하며 조금은 이타적인 사람으로 발전하게 된다던가 삼식이로 전락해 자존감을 바닥에 깔고 살던 아버지가 자격지심의 무게를 벗고 당당하게 밥그릇을 사수하게 된다던가, 남편의 그늘에서 색깔 없이 살던 어머니가 드디어 자신의 색을 갖게 되거나, 세상 밖에서 일어난 일들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성장하는 아이의 이야기들 말이다.
하늘길이 닫혀있는 지금, 전혀 자유로울 수 없는 순간에도 우리는 자유로이 날아가는 꿈을 꾼다. 그곳이 어디든, 누구와 함께든 말이다. 언젠가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그날을 간절히 소망하며 여행이 고픈 이 순간도 참고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 다시 올 그날을 위해, 여행에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이 여행기를 준비운동 삼아 읽어봐 주기를.
여행기를 읽으며 숨 고르기를 해도 좋고, 바쁜 하루 잠시 고개 돌릴 건수여도 좋겠고, 앞으로 있을 여행 계획에 감동이 한 스푼 얹어진 도움이 된다면 더없이 좋겠다. 전혀 다른 세대를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찬란하고 뭉클한 이야기는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는 그대의 가족 이야기와 같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며 갑갑한 지금 이 시국을 견디는데 나의 이야기가 한몫해주길 또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