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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ghteoff Jan 27. 2021

눈으로만 봐주세요

사람으로도 봐주시고요




몇 주 전 눈이 많이 왔을 때,  앞에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혼자 만들었지만 눈사람은 두 명으로. 사실 올라프 못지않은 3 눈사람을 만들려고 했는데, 비율 조절에 실패해 그냥 평범한 2단 눈사람 두 명이 되었다. 사진을 본 동생은 '당고(일본식 꼬치 음식)' 같다고 했다. (나는 그 와중에 '당구공'으로 잘못 들었다. 청력 검사가 시급하다.)


한 뼘 좀 넘는 조그만 눈사람들을 작은 가로등 옆에 나란히 두고, 장갑에 붙은 눈을 털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마 아무 생각 없었을 것이다. 나는 찍은 사진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SNS에 올렸다.


눈사람은 이틀 뒤인 일요일에도 멀쩡했다. 제법 오래가는데? 햇빛에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하며 동그랗게 깎인 모양새가 예뻤다. 신이 나서 사진을 또 찍었다. 그때 처음으로 얘네들이 오래 버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사람에 나를 투영한 것도 아니고, 누굴 생각하고서 만든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어느새 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한동안 집 밖을 나설 때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곤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나는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눈사람의 머리통이 날아가버린 광경을 목도했다.


표현이 좀 거친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머리통은 저 쪽에 있고, 몸통은 쓰러져 있고. 두 명 다 그랬다. 이건 분명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이 한 짓이었다. 나는 어떤 놈이냐고 툴툴대며 장갑도 안 낀 손으로 눈사람을 다시 세워놨다. 하지만 그 후에 또 쓰러졌을 것이다. 아니, 쓰러뜨렸을 것이다. 최근 커뮤니티에서 화제인 '남이 만든 눈사람을 일부러 부수는 사람들' 이 떠올랐다. 보기만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태를 막상 내가 당하고 나니 어이가 없었다. 한 뼘 만한 눈사람을 굳이 그렇게 건드리는 심보는 뭘까?


오래전 '마트에서 파는 판두부를 보면 주먹으로 쳐서 부수고 싶다'는 글과 그에 공감하는 댓글을 본 적 있다. 뽀얀 두부를 마구 부셔서 쾌감을 느끼고 싶다나. 나는 한 번도 한 적 없는 생각이라 신기해한 기억이 난다. 눈사람도 비슷한 충동인 걸까? 뽀얗기도 하고, 차갑지만 어쨌든 부드러우니까.


하지만 머리와 몸통이 있고 눈코입과 팔이 달려 있는 눈사람과 두부는 역시 같다고 볼 수 없다. 눈사람을 주먹이든 발로든 부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좀 섬뜩하지 않은가? 특히 그 크기가 크고 사람과 가까운 형태일수록. 만약 두부에 눈코입이 있었다면 눈사람과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건 역시 '눈코입'이 붙어있는 것. 즉, '고통을 느끼는 존재'를 부수는 행위는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눈사람이 고통을 느끼고 말고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쉽게 부서지는 존재, 약한 존재, 말 못 하는 존재를 향한 폭력은 여기서 시작된다.


쉽게 부서지는 존재, 약한 존재, 말 못 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정성껏 보살펴도 모자란 존재에 학대와 폭력을 일삼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를 지키지 않는 자. 나는 그들의 짐승만도 못한 짓이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개미떼를 일부러 밟아 죽이는 짓, 작은 눈사람을 기어이 부수는 짓이 결국엔 동물학대와 아동학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고작 눈사람을 두고 이런 생각의 갈래를 뻗어나가는 것이  당황스러운 사람에게는, 고작 눈사람을 구태여 부수는 행위는 당황스럽지 않은지 되려 묻고 싶다.


나는 눈사람을 '두 명' 만들었다. '두 개'가 아니라 '두 명'. 나는 그들이 따뜻한 햇빛에 녹는 엔딩을 원했다. 눈사람은 그래야 했다. 타인에게 무참히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세워둔 눈사람은 며칠을 버틸 수 있었을까. 차가운 겨울비에 쓸려내려 갔길 바란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눈사람을 '눈'으로도, '사람'으로도 봐주지 않는 누군가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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