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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상 May 16. 2024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리뷰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문학사상사, 한국판 제목 상실의 시대)의 표지는 강렬하다.


푸른색 물감 위에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한 하얀 인간, 심장이 터진 채로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을 보자니 어딘가 서먹하다.


이처럼 강렬한 표지와 제목으로 인해 잊어본 적은 없던 책.


도서관, 학교, 카페, 심지어는 동네 미용실에도 있던 이 흔한 소설을 읽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름만 알고 지내던 지인과 가까워진 일을 기념하는 느낌으로 글을 적는다.


*스포일러 주의*

(줄거리를 제외한 작품의 감상입니다.)


90년대를 향유하고 지금까지 베스트셀러로 통하는 소설이지만 막상 읽었을 때는 '왜?'라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쉴 틈 없이 섹스만 하는 남자 주인공 '와타나베' , '와타나베'를 기다리게만 하는 고구마(?) 여주 '나오코' 13살 여학생한테 덮쳐진 30대 여성 '레이코', 섹드립을 난사하는 '미도리' 등 무언가 줄이거나 없애도 될 것 같은 느낌의 묘사들 때문이었다.


"야설 아니야?" 소설에 대한 내 이야기를 듣고 친구가 한 대답이다. 확실히 '아니다'라고 말했지만 그 이상의 설명을 하기 어려웠던 나는 소설을 다시 읽고 곱씹었다. 그 결과 노르웨이의 숲은 내게 전보다 더 무겁고 진중하게 다가왔다. 젊은 날의 사랑과 그로 이한 상실이라는 주제처럼 소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느낀 소설의 미를 몇 가지 키워드를 나열해 정리해 보겠다.



1. 삼각관계

 노르웨이의 숲의 인물들은 '삼각관계'에 얽혀있다. 삼각형의 꼭짓점처럼 고정되어 벗어나지 못한다. 소설은 '와타나베', '나오코', '기즈키'의 삼각관계에서 그 연장이 되는 '와타나베', '나오코', '미도리'의 삼각관계로 하중을 옮긴다. '기즈키'의 죽음으로 벗어날 수 없는 상실을 경험한 나오코는 과거에 묶여 있는 존재다.  나오코는 기즈키의 친구였던 와타나베와 기즈키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의 기억을 공유한다. 죽음으로 인해 사라질 뻔한 삼각형이 기억으로 남아 형체를 유지한 것이다. 이로 인해 나오코와 와타나베는 만남을 유지하고 지속한다. 만남 속에서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사랑하게 된다. 와타나베는 기즈키로 향해 있던 변을 접어 나오코에게 향하고 싶어 한다. 하나의 직선, 그 직선 위에 서 있는 두 남녀, 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에 올라타 같이 나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오코의 거절로 인해 실패한다. 니오코는 기즈키를 잊을 수 없다. 기즈키에 대한 기억을, 상실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요양원을 가기 전 와타나베와의 섹스와 '기억해 줘'라는 나오코 말과 몸짓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그 섹스 이후 자신은 젖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와타나베는 이를 나오코에게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기다려 달라는 신호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이해였다.


"왜 그때의 섹스에는 젖었는데 지금은 젖지 않을까?" 당시의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자신의 선을 모두 포개었기에 젖은 것이 아닐까. 즉 기즈키에 대한 상실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나오코의 시간을  미래로 향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와타나베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기분이 나오코를 젖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는 잠시의 체험에 대해 불과했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와 달리 기즈키를 안고 살아갈 수 없었다. 혹은 안고 살아가는 것과 잊는 것을 혼동했을 수도 있다. 항상 뜨는 태양, 그리고 달의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리고 이를 나무라지 않는 것처럼 기즈키를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다. 와타나베에 대한 마음도 상실에 대한 공유에서 온 마음일 수도 있다. 결국 젖지 않는다는 것은 당시의 와타나베의 바람과는 달리 자신을 사랑하는데 실패할 것이라는 나오코의 마음에 대한 암시였던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기억해 줘.'라는 나오코의 말로 연결된다. 나오코의 짧은 삶은 기억해야만 하는 삶이었다. 끊임없이 '기즈키'를 기억하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상실을 이겨내고 안고 가기에는 나오코는 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와타나베에게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말을, 나체를 보여주는 몽환적인 몸짓을 보여준다. 자신을 남기기 위해.


이렇듯 다가가지 못하고 기다리게만  하는 나오코의 모습 때문에  '주체적이지 못하다 혹은 이기적이다'라는 말이 많다. 나도 어느 정도 수긍한다. 하지만 나오코의 또 다른 대사 ‘너 혼자라도 가줘’를 곱씹어보니 그러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같이 갈 수 없다면 '너 혼자라도 가줘'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이 대사는 자신과 와타나베에 대한 이해와 바람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은 상실을 극복할 수 없겠지만 와타나베는 그럴 수 있다. 자신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함께하지 못해도 꿋꿋하게 살아가라. 이렇게 이기적이거나 비주체적으로 보이기에는 따뜻한 심정,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나오코는 자기는 물론 와타나베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이해가 사랑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난 후 아래의 독백으로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을 고한다. 미도리와의 만남 이후였는지, 나오코가 떠난 후였는지, 희미하지만 기억되던 나오코에 대한 회상 속에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와타나베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나를 언제까지라도 잊지 말아 줘. 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한없이 밀려오는 서글픔을 참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를 사랑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 문학사상사


이해의 과정 속 '미도리'라는 존재가 나타난다. 미도리는 와타나베의 편지 속에서 나오코에게 알려지고. 이때부터 삼각관계는 '와타나베, 나오코, 미도리'로 옮겨진다.


 미도리는 나오코와는 여러 대조적인 인물이다. 활달한 성격은 물론 와타나베에 대한 적극적인 구애, 그리고 쉬지 않는 섹드립까지 나오코와는 천지차이이다. 눈에 띄는 차이는 역시 와타나베에 대한 구애일 것이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기억해 줘'라는 모호한 말을 남기지만 미도리는 그런 비슷한 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 기다리는 주체도 변경된다. 기즈키, 나오코, 와타나베의 관계에서는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기다렸지만 미도리, 나오코, 와타나베의 관계에서는 미도리가 기다려야 하는 존재가 되며 적극적으로 구애한다.


그리고 상실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미도리는 자신의 아빠가 죽자 이에 굴복하지 않고 안고 살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아빠의 사진을 보며 "아빠, 이건 보지야.'...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남긴다. 갑자기 튀어나온 어이없는 대사에 혼을 뺏기지만 이는 상당히 의미 있는 대사다.


나체를 보여주는 행위는 나오코와 미도리에게서 모두 나타난다. 나오코의 나체는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것으로  와타나베에게 투영되는 과거의 이미지지만 미도리의 나체는 아빠를 잃은 상실을 극복하고 안고 가겠다는 미래에 대한 의지이다. 미도리는 상실을 안고 살아갈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미도리의 아빠는 와타나베에게 '차표, 미도리, 우에노 역, 부탁'으로 정리되는 말을 남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석이 갈리겠지만 난 아내나 자신에게 헌신하기만 했던 미도리에게 모든 걸 잊고 우에노 역에서 떠나는 차표를 사달라는 말로 들렸다. 자신을 잊고 자기를 잊어달라는 말을 딸에게 남긴 것이다. 하지만 미도리는 자신의 나체를 보여주는 행위로 아빠에 대한 기억과 사랑, 상실을 안고 살아가겠다는 선택을 한다. 이렇게 미도리는 나오코와는 다르다.


미도리는 갈팡질팡하는 와타나베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리고 와타나베는 이러한 미도리와의 상황과 자신의 마음을 나오코와 레이코에게 편지로 고하는데 여기서 이 소설에 나타난 지극히 연애적인 삼각관계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서사적으로 와타나베의 미도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커지고 이에 대한 고민이 전달될 때마다 나오코의 병세는 심해지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오코와 미도리. 둘은 작중에서 서로 본 적도 없지만 영향을 준다. 와타나베를 사이로 중개되면서 묘한 방식으로 삼각관계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결국 나오코의 죽음 후 와타나베와 미도리는 이어진다. 떠난 나오코, 남은 미도리와 와타나베, 이 셋의 관계는 미도리와의 전화 사이에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가’라는 와나타베의 되새김에 연결된다. 관계의 끝과 새로운 시작을 나타내는 되새김을 소설에 끝에 위치시키는 기법, 오히려 끝난 듯한 삼각관계가 절정에 이르는 인상을 주며 마지막 페이지가 넘겨지는 것이다.





2. 얕은 삼각관계


 위의 삼각관계가 소설을 관통하는 삼각관계다. 하지만 소설의 모든 관계를 담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삼자 간의 관계 혹은 두 명 사이에서 이야기되는 다른 이도 소설의 삼각관계에 포함된다 할 수 있다. ‘돌격대’, ‘레이코’, ‘하쓰미’, ‘미도리의 남자친구’들이 얕은 삼각관계의 주인공이다. 돌격대와 미도리의 남자친구가 비슷한 성격으로 묶일 수 있고 하쓰미는 나가사와와 대비되는 와타나베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레이코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존재다. 레이코의 이야기 ‘장례식’에서 후술 하도록 하겠다.


재밌는 모습을 보여주는 돌격대. 돌격대는 와타나베를 많이 귀찮게 하지만 중요한 역할도 수행한다. 바로 와타나베의 입을 통해 이야기되는 것이다. 돌격대의 이야기를 들은 나오코는 미소를 보인다. 힘들어했던 나오코를 보고  와타나베는 그녀가 돌격대를 괜찮 게 생각하는 것으로 여긴다. 작중 웃는 모습이 적은 나오코를 보면 이는 그냥 넘어가기 힘든 부분이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제삼자의 이야기를 하는 건 굉장히 흔하다. 하지만 돌격대가 단순히 이야기 소재로 사용됐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나는 돌격대가 상실로 연대된 와타나베, 나오코, 기즈키를 받쳐 주는 역할을 했다고 본다. 기즈키로 매개된 관계에 돌격대는 낯선 존재다. 사라진 기즈키를 대신하는 건 단순히 그에 대한 기억뿐이다. 기억뿐인 관계는 작중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서히 무너져 간다. 나오코가 기즈키를 잊을 수 없는 것과 달리 와타나베는 그를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돌격대는 이에 스며들어 그림자 같은 삼각형을 그린다. 겹칠 수 있는 엷은 삼각형은 진짜 삼각형에 있는 자들을 이어주거나 멀어지게 혹은 잠시 뿐인 즐거움을 준다. 그 효과가 미미하더라도 변화를 주는 것, 그것이 돌격대의 역할인 것이다.


 미도리의 남자친구도 이와 비슷하다. 미도리의 남자친구는 미도리가 좀 더 차분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미도리를 그걸 원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남자친구를 와타나베와  비교하면서 은근한 사심을 보낸다. 미도리의 남자친구가 둘의 관계에 영향을 준 것이다.


돌격대와 미도리의 남자친구 모두 누군가의 관계에 영향을 준다. 잠시 뿐인 즐거움일지라도, 구애의 요소일지라도 말이다. 진짜 삼각관계에 영향을 주는 그림자 같이 엷은 삼각관계, 둘의 역할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나가사와를 사랑하는 하쓰미. 이 둘을 보자면 어딘가 답답하다. 엄친아지만 오만한 나가사와에게 하쓰미는 아깝게 느껴진다.  나가사와는 하쓰미에게 와타나베와 자신은 닮았다고 말한다. 와타나베는 이를 부정하는데 여기서 나오는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이해이다.


 나가사와는"사람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시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지, 그 누군가가 상대에게 이해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지 확 와닿지는 않았다. 나가사와처럼 어려운 말. 짐작 정리하자면 이해란 하고 싶어서, 할 수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이해란 그런 시기나 때가 와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가사와는 타인에게 이해를 바라지 않는다. 연인인 하쓰미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또한 자신도 하쓰미를 이해할 수 없다. 아직 그러한 시기가 오지 않았으니까. 또한 나가사와는 타인에게 이해를 바라지 않는 점이 자신과 와타나베의 공통점이라 말한다. 와타나베는 서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있다고 이를 즉각 부정하지만 나가사와는 커피를 먹는 시간의 차이일 뿐 자신의 사고와 거의 같은 것이라 말하며 비슷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나가사와의 생각과 달리 내가 본 와타나베는 그와 다른 인물이다. 와타나베는 기본적으로 따뜻한 인물이다. 이런 점은 소설 전반에서, 특히 나가사와와 다투게 된 하쓰미의 곁에 있어주는 부분에서 나타난다. 조언을 통해 하쓰미에게  이별을 권하는 모습은 와타나베의 따뜻함의 상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따뜻함은 이해의 결에서도 나타난다. 이해에 있어 자신과 비슷하다고 말한 나가사와지만 이해의 방식에서도 둘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나오코를 기다리는 와타나베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는 나오코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이해가 이해하려던 척 혹은 이해해야만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사랑에는 그런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가사와는 이해의 시기만을 기다렸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결국 하쓰미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상실로 그에게 몰이해의 벌을 내린다. 이렇듯 나가사와와 하쓰미와 연결되는 얕은 삼각관계는 사랑에 대한 자세의 차이를 보여준다. 닮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두 남자, 소설이 연애 소설이라는 걸 되새겨 본다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3. 섹스

소설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섹스. 덤덤하게 그리고 착실히 묘사된다. 젊은 세대의 섹스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보여준다는 이야기도 많지만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작중에서 나오는 섹스는 첫째 고독을 잊기 위한 섹스, 둘째는 사랑을 표현하는 섹스, 셋째는 상실을 나누고 이겨내기 위한 섹스이다.


나가사와의 헌팅, 기차역에서 만나게 된 작은 여자와의 하룻밤은 모두 고독을 잊기 위한 섹스이다. 갑자기 사라진 나오코를 대체하기 위한, 그녀 때문에 생긴 고독을 달래기 위한 섹스인 것이다. 이러한 섹스는 당연하게도 사랑은 아니다. 섹스 대상자는 모르는 진정한 사랑을 위한 섹스다. 그래서 이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의미가 있는 능동적인 행위이다. 이것을 알리기 위해 덤덤히 착실하게 표현해 눈길을 끄는 것 같다.


사랑으로서의 섹스는 요양원의 가기 전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섹스로 나타난다. 이 섹스에 대해 잘한 것인지 후회하는 와타나베, 어쨌든 간에 와타나베는 나오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나오코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오코는 이 섹스 이후 젖질 않는다. 기즈키에 대한 기억을 뒤로하고 와타나베라는 미래를 경험하는 것, 그것은 나오코에게는 무리였다. 즉 젖지 않는다는 것은 둘 사이 사랑의 실패를 암시한다.


상실을 나누고 이겨내기 위한 섹스는 레이코와 와타나베가 마련한 나오코의 조촐한 장례식에서 치러진다.


이 둘이 섹스를 하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두드려 맞아 머리가 멍했지만 상실이라는 소설의 주제와 연결해 보면 작가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었다. 레이코와 와타나베도 삼각형을 그린다. 한 편은 나오코에 대한 기억이 차지한다.


둘은 나오코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상실로 연대되어 있는 존재다. 예전에 나오코와 와타나베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상실로 인해 무너진 나오코를 잘 아는 그 둘은 나오코와 달리 미래를 살아가야 한다. 혼자 가지면 너무도 큰 커다란 상실 안고 말이다. 따라서 그 둘은 상실을, 나오코에 대한 기억을 나누고자 한다. 장례식은 죽은 자의 넋을 가리기 위해 실시된다. 하지만 죽은 자는 그것을 보지도 인지하지도 못한다. 결국 장례식이라는 것은 산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이 슬픔을 공유하고 이를 나누는 자리인 것이다. 장례식에서 벌어지는 뜬금없는 섹스, 그것은 어찌 보면 적절한 선택이었다. 상실을 안고 살아가기 위해 섹스 정도는 그냥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섹스로 레이코와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죽음에 대한 슬픔, 추억을 영원히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 "행복해야 돼" 하고 헤어질 때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내가 와타나베에게 충고할 만한 건 이미 다 했으니        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행복하라는 것밖에는. 내 몫과 나오코의 몫까지 합한 만큼 행복해야 돼.">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 문학사상사-




4. 태엽

작가의 다른 작품인 태엽 감는 새와 연관이 있는지는 모른다. 태엽은 감으면 에너지가 응축된다. 응축된 에너지로 인형은 움직인다.


 나오코에게 편지를 쓰는 일요일에는 태엽을 감지 않는 와타나베. 나오코만을 위한 시간이라는 인상을 주는 듯 하지만 그렇지 않다. 평범한 연애소설이면 그러겠지만 아시다시피 나오코는 와타나베를 사랑하지 않는다. 태엽을 감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을 멈추는 것이다.


오늘을 그리고 미래를 살아가기 위한 힘은 태엽을 감아야 나온다. 이를 멈추면 당연하게 시간은 흐르지 않게 된다.


태엽을 감지 않는 와타나베. 나오코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자신이 와타나베의 미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오코 자신은 기즈키에 얽혀 있다. 그런 자신과 함께 간다면 와타나베는 미래를 살아갈 수 없다. ‘너만을 위한 시간’, ‘나를 위해 태엽을 감아줄 너를 기다린다.’ 등 와타나베의 의도가 어쨌든 나오코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이 한 사람의 미래에 훼방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으로 재촉됐든 아니든 결국에는 나오코의 죽음으로 태엽을 감지 않는 시간은 소멸한다.


옭아매는 기즈키와 기다리는 와타나베, 그 사이에서 나오코는 자유로워지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무책임한 죽음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나오코의 죽음은 와타나베를 그녀에게서 벗어나게 해 줬다. ‘너 혼자만이라도 가줘.‘의 말에 맞게 나름의 방식으로 자유를 선사한 것이다. 강한 와타나베는 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죽음으로 자유로워지고 싶다.'처럼 말이다. 어쨌든 하나의 행위는 각자에게 다르게 적혔고 두 사람은 서로의 길을 향했다.


6.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삶의 일부.

작중 유일하게 굵은 글씨로 적힌 이 글은 소설을 관통한다. 죽음이라는 상실은 작중 무수히 많이 나타난다. 기즈키, 나오코의 언니, 하쓰미, 미도리의 부모님 등. 상실을 이겨낸 사람들은 이것을 안고 삶을 살아간다. 완전히 잊거나 물리치지는 못한다.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잊지 못하고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죽음이 삶의 일부인 것처럼 상실도 삶의 일부이다. 누군가의 죽음이 바로 상실이 되기 때문이다. 상실은 인간에게 각인된다. 무언가를 잃어 비린 것이지만 완전히 떠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늘 기억을 떠돈다. 사람을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인생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상실을 안고 하루하루 나아간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자들도 있다. 소설 속 요양원에 들어간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들은 영원히 요양원에 머물거나 혹은 레이코처럼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떠나거나 나오코처럼 자신의 선택을 감행하는 자들로 나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이들의 선택이 그들과 연관된 와타나베처럼 다른 이들의 상실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연쇄의 고리인 상실. 안고 미래를 향해 갈 수 없다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요양원으로 환기되는 상실을 안고 갈 수 없는 사람들,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 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너와 나, 그리고 모두를 위해 소설이 던지는 물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7.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장례식 후, 떠나는 레이코를 배웅하고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어디 있느냐는 미도리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와타나베.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 속에서 계속 미도리만을 찾을 뿐이다.


이 장면을 두고 해피엔딩이다, 열린 결말이다, 새드엔딩이다 등 많은 말이 나온다. 나는 결말에 대해서 해피한지 세드 한 지 나누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한 번 적어보도록 하겠다 이리저리 생각하다보니 해피한 것 같기도 하고 새드한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보는 가에 따라 지금까지 적은 글의 결이 달라지고 부정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그 순간의 인상이 이러했다 식으로 이해해 주면 좋겠다.


<Happy>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나오코를 잃은 와타나베의 현실을 보여준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대상이 없어진 지금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순간적인 방황을 경험을 하는 것이다. 나오코는 와타나베의 이정표였다. 나오코로 표현하던 자신의 삶은 그녀가 사라지자 방향을 잃었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이렇게 무너지지 않는다. 애타게 미도리를 찾으면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나오코는 자신이 원했던 것처럼 기억에 남았고 와타나베는 이를 안고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 이 기억은 때때로 생각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실패나 방황의 상징은 아니다. 또한 해소되지 않아서 기억나는 것도 아니다. 기억에 남았기에 , 상실의 기억이기에 당연히 생각나는 것이다. 오히려 상실이 지나간 황량한 터에 세워진 이정표는 더 강하게 자리 잡힌다. 무언가를 이겨내고 스스로 선택한 사랑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Sad>

 소설의 첫 부분을 보면 미도리와의 삶이 평탄하게 펼쳐졌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시간의 간격도 있고 묘사되는 것은 나오코를 그리워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보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끝없는 방황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상실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강하지만 어떻게 안을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와타나베는 방황을 안았고 미도리와의 사랑도 그것을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결국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은 소설의 시작과 연결된다. 소설은 그리워하는 나오코에 대한 회상록이다. 해소되지 않는 물음이 있었기에 소설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상실을 방황으로 안게 된 와타나베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지 못했다. 그에게 이정표란 '노르웨이의 숲'일 것이다.




맺음말

소설의 리뷰를 처음 적어보는데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어처구니없을 해석보다는 감상적으로 글을 적어볼까 하고 시작했지만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술술 읽히지만 생각할 것은 많은 소설, 노르웨이의 숲. 하루키의 함정에 빠진 것 같다. 다른 소설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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