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읽고 쓰기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올해 1월 13일부터, 새벽에 일어나 세 페이지의 글을 썼다. 뚜렷한 목적도, 정해진 내용도 없었다. 처음에는 커다란 옥스퍼드 노트에 썼다가 손가락과 손목이 너무 아파 다이어리 사이즈로 바꾸었다. 처음에는 속도가 느리던 펜이 꾸준히 걷고 달린 사람 마냥 점점 탄력 있어지고 속도가 붙었다. 연필, 만년필, 볼펜, 샤프, 다양한 색깔 펜들을 쓰며 나를 기쁘게 하는 필기감과 색채를 찾았다. 키보드가 아니라 내 몸을 빌어 썼다.
내 안에 무엇인가가 나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썼다. 사회적인 쓰기도 이어졌다. 심사를 받고 결제와 보고, 학부모 의견서가 이어졌다. 쓰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은 존재하지 않을 듯 하다. 그 모든 상황과 상관없는 나만의 쓰기를 이어갔다. 새벽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강박적으로 정해놓은 시간에 무엇인가를 하는 입시 기계가 아니니. 어른인 나는 그냥 나와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냥 좋았다.
글쓰기에 집중하면서 회복한 감각과 능력이 있다. '그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힘이다.
글은 모든 일이 흘러간 후에 지나간 서사를 정리하게 된다. 미래를 상상하고 그려보는 일도 가능하나 그것은 자주 글쓰기에 등장하진 않는다. 미래는 다가오지 않은 과거이다.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온전히 그 순간에 머무는 감각을 서서히 회복해 가고 있다. 흡사 재활치료와 같다. '엄마'에겐 본인의 순간에 머무는 일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기대되지도 않는다. 아빠의 돌봄은 회자되고 칭송하는 목소리를 걸치게 된다. 엄마의 돌봄은 다르다. 요구되고 당연하게 여겨지며 그 정도가 일정한 정도에 이르지 못하면 비난받기도 한다.
엄마의 육아는 아빠의 육아와 다르다. 아빠의 육아는 자신을 희석시키는 정도로 가능할 수 있으나 엄마의 육아는 자신을 삭제해야만 가능하다. 지금은 젠더갈등이나 성차별을 얘기할 타이밍은 아니기에 그런 시각에서의 해석은 자제해 주시길 바란다. 나는 나를 아끼고 인류애를 발휘하여 동지로 살아가는 남편의 노고를 익히 알고 감사한다. 다만 지금 글쓰기를 통해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지 말할 뿐이다.
나는 보통의 엄마이고 보통의 여성 보통의 글 쓰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 삶의 밖이 아니라 내 안의 세계에서 일어났던 일을 나는 지금 쓰고 있다. 사랑해 마지않아 갈등이며 샘물인 아이들이 자신만의 우주를 형성하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나는 블랙홀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매일 읽고 썼다. 나와 내 아이가 다른 존재이면서 가족으로, 사람으로 불리듯 계절은 자신을 닮지 않은 다음 계절을 낳았다. 그 모두가 삶이었다. 올해 초 만난 겨울과 닮지 않은 겨울로 가는 11월, 나는 여전히 읽고 쓰며 나를 길어 올렸다.
하루키는 달리는 쓰는 사람이다. 달리기가 버거운 나는 걷기 시작했다. 걷기와 산책은 '내'가 '나'를 느끼게 한다. 나는 운동을 꾸준히 하는 습관이 없다, 없었다. 걷기를 꾸준히 하는 습관도 없다, 없었다. 지난주에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오디오북으로 들으며 산책을 했다.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소크라테스의 법정 최후 진술을 들었다. 아테네 사람들이여, 멜레토스여.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고발한 이들의 이름을 부른다. 자신의 진실에 귀 기울일지 모를 아테나이들을 부른다. 그가 하나하나 옳지 않음을 따져가는 과정을 들으며 나는 아테네의 세금을 내는 남성 시민인 양 산책을 했다. 걷기를 시작한 지 1시간이 다 되어 갈 즈음 소크라테스가 말했다.
어떻습니까? 그래도 내가 유죄입니까? 이 짧은 시간에 당신들의 나에 대한 그릇된 생각과 고정된 편견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떻습니까.
그 말을 듣고 오디오북 재생을 멈췄다. 나는 이렇게 소리 내어 말했다.
어떻습니까? 그래도 내가 유죄입니까? 이 짧은 시간에 나 자신의 나에 대한 그릇된 생각과 고정된 편견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떻습니까.
어제는 핸드폰도 내려두고 음악도 듣지 않고 책도 없이 그냥 걸었다. 그렇게 걷자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가장 소홀히 했던 것들이 내게 다가왔다. 내 보폭과 발등을 조여 오는 운동화 끈의 감각. 흑백의 조화를 이룬 까치들과 온통 검은 밤하늘을 머금은 담은 까마귀들, 오후 5시의 물에 잠긴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날개 아래 고개를 밀어 넣고 잠을 청하는 오리의 둥근 목, 물에 잠겨 이따금 흔들리는 주황빛 물갈퀴와 발목들, 잎들이 온통 숨겨두었던 색으로 피어나 두 번째 봄을 맞이한 가을이 나와 함께 걸었다.
발이 아팠다. 아이를 낳고 허리 통증이 심해지며 왼쪽 다리가 찌르르 찌릿 바늘을 박듯 아팠는데 왼발이 힘겹다 한다. 오른 다리가 '그래도 가자'라며 격려했다. 앞으로 앞으로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호수가를 지나, 내가 '거기까지 가볼 테야'라고 정한 지점으로 향했다. 발과 다리는 어디까지 갈 건지 어떤 속도로 걸을건지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힘들다 싶으면 두 팔이 '내가 좀 도와줄까?' 라며 경쾌하게 박자를 맞추며 함께 걸었다. 나의 온몸이 나만을 위해 존재했다.
브런치 작가라는 기쁜 정체성을 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감사하게도 출판의 인연이 다가왔다. 책을 낸 이들은 모든 것이 달라지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한다. 살아내야만 하기에 죽고 싶은 날들을 건너왔다. 그런 것인가, 짐작해 본다. 알 수 없다. 알지 말자.
나는 오늘도 걸을 테지. 읽고, 쓸 테지. 기다리는 이 없어도, 읽어주는 사람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를 길어 올릴 테지. 누군가는 머리를 쓰다듬고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람처럼 가벼이, 또 다른 이들은 디지털 부호가 형상화된 하트로, 글로 자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언어를 지닌 이들은 귀한 시간과 마음을 글자라는 옷을 입혀 남겨주시기도 하겠지. 그리고 그 안에는 '나'와 나를 지켜보고 '기어이 알아채는 나'도 있겠지. 그래서 오늘도 걸으려 한다. 단어를 심어 문장을 틔우고 자신을 닮은 존재를 키워 숲을 이룬 작가님들의 사이를. 그리고 나 말할 테지. 당신의 손끝에서 피어난 계절을 걸으러 왔습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