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지막에는 케이크를 더해주렴
연말이다. 캐럴을 들으며 기말고사 업무를 마쳤다. 한 학기 동안 내가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인생 경험을 더해 수업을 진행한다. 매 학기가 한 권의 책과 같다. 내가 뼈대를 세우면 학생들이 살을 붙인다. 나는 생각할 거리가 풍성한 평생교육원의 수업을 사랑한다. 생애주기 어느 순간을 통과하는 중이든 남은 생의 새롭게 준비하는 마음은 한결같이 젊고 푸르르다. 사회적인 업무를 마치는 시간은 가족이 연말을 보내는 순간과 맞닿아 있다. 케이크의 시즌이다.
"엄마, 나 스초생."
큰 애가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한다. 아, 그 미모의 배우들이 미장센 가득한 화면에 아름답게 등장하는 스트로베리 초코 생크림 케이크 말이구나. 먹고 싶다, 갖고 싶다, 하고 싶다가 별로 없는 아이가 뭔가를 요청하면 반갑다. 기말고사를 치르느라 힘들었는지 얼굴이 까슬해진 아이 얼굴을 만져보며 그래, 알았어, 대답했다. 겨울이니 딸기가 제철이고, 초코는 불변의 진리이며, 크리스마스이니 생크림의 부드러움이 어울린다. 바라는 바를 말하는 아이가 있고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 이번 연말에도 찾아와 고마울 뿐이다.
아이와 같이 매장에 갔다. 정말 작고 앙증맞다. 가격은 어울리지 않게 사악하다. 신나서 함께 간 아이가 가격을 보더니 조각 케이크로 시선을 돌린다. 홀케이크를 사도 좋다고 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우리 집은 크리스마스에 주로 얼그레이 화이트 케이크를 즐기기에 두 가지 다 맛보고 싶은 아쉬움도 있는 듯했다. 무엇보다 스초생이 늘 즐기던 얼그레이 화이트 케이크보다 아름답지 않았다. 눈처럼 하얀 생크림 위에 무심한 듯 올라간 베르가못 잎들의 신비한 푸른 보라색이 그 자체로 보는 즐거움이 큰 케이크였다. 고민하는 아이를 보며 문득 얼마 전 먹었던 다른 케이크가 떠올랐다.
얼마 전 둘째의 생일파티를 했다. 원고 준비, 기말고사 업무로 정신없이 바빴지만 이제 제법 많이 자란 아이들은 넉넉한 먹거리와 시간만 주면 알아서 파티를 즐긴다. 이번 생일에 둘째는 코스트코에서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해 달라고 했다. 아무 장식 없이 커다란 직사각형 초콜릿 케이크에 자신의 이름과 생일 축하 메시지만 적어달라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둔 아이의 선택을 나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날 나보다 더 크게 자란 아들 친구들 6명이 집에 왔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플 나이, 뒤돌아서면 허기진다는 나이답게 엄청난 양의 치킨과 준비된 식사를 깨끗이 비워냈다. 그리고 게임을 즐기며 두고두고 케이크를 한 조각씩 잘라먹었다. 그날 아이들에게는 눈으로 즐기는 케이크보다 마음껏 잘라서 편안하고 계속 즐길 수 있는 케이크가 제격이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케이크는 화목해 보이는 가정의 상징이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커지는 마법의 트리거였다. <성냥팔이 소녀>에서 케이크는 자신의 손에 닿지 않는 저 너머의 현실이었다. '케이크'라는 이름을 가진 이 존재는 극도의 행복과 만족, 희망이면서 선택에 따른 고통, 도전, 절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순간 삶에서 함께 한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갑자기 아이와 보내는 평온한 오후에 나의 죽음이 떠올랐다. 부디 우리가 세상에 온 순서대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라본다. 오늘 아이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먹을 케이크를 골랐고, 나는 아이의 입 속에 녹아내려갈 달콤함을 바라볼 것이다.
언젠가 너희는 부모없이 모든 것을 고르고 결정하여 너희만의 방식으로 삶을 운영해가겠지. 그렇게 너희는 자라고 나는 나이들어 마지막으로 향할 거다. 내가 마지막 숨을 정리해갈 때 즈음,너희 둘이 상의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를 준비해주면 좋겠어. 너희들이 같은 케이크를 고를지 아니면 뭘 골라야할지, 아예 모를 지도 몰라. 그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을 테니까.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저 케이크 한 조각을 위해 누군가는 제누와즈를 굽고 크림과 초코를 준비하여 딸기를 글레이징하여 얹기까지 오랜 준비와 정성을 쏟았을 거야. 씁쓸한 삶이라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한 조각의 달콤함이 되어 살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 다정하게 나눠보자, 달콤한 우리의 지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