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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재 Nov 12. 2024

엄마도 '나만을 위한 책'을 사고 싶어

나는 주문한다,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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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에 문자가 뜬 순간, 시공이 일그러지며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현관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여있던 물건들이 점과 선으로 변하며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블랙홀 가장자리 사건의 지평선 너머, 나는 지금의 현실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삐리릭. 닫힌 입을 벌린 현관문 아래쪽 지니의 램프가 그려진 택배상자가 어서 문질러달라며 우주먼지를 뒤집어쓴 채 손을 내민다. 누가 볼세라 얼른 품에 끌어안았다. 모처럼 33평 1층 아파트 복도를 내달린 중년의 심장이 옛날옛적 캠퍼스를 거닐던 남편을 봤던 때처럼 마구 두근거린다.


심호흡을 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택배 상자를 가른다. 0.5cm 일본산 세라믹 나이프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틈을 만들자 창백한 낯빛의 '거래명세서'가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공항검색대 엑스레이를 능가하는 눈으로 명세내역을 쫘아악 훑어내리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모든 것이 괜찮고 모든 것이 내 앞에 준비되어 있어. 내 세상은 이미 완벽해. 이제 내용물을 볼 차례로군. 섬섬옥수는 이미 한참 전에 물 건너간 주부의 손으로 완충재를 조심조심 벗기자, 아, 찬란하도다. 내 책, 내 책. 내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에게 밑줄로 말을 걸며 내 영혼에 새겨갈 나의 책들.


                           



"김영하야, 나야?"

19살에 학교 선배로 만났고 서로의 연애상담을 해주다가 24살부터 연인으로 만난 사람. 연애가 길어질수록 나는 데이트를 할 때 김영하 작가의 책에 눈을 두고 사랑을 말했고, 그는 스타 크래프트가 전개되는 모니터에 눈을 두고 사랑을 운영했다. 자기도 그랬던 주제에, 사랑이라는 호르몬 교란 상태에서 공기보다 가벼운 질투에 빠진 남자친구(지금의 남편)는 나에게 김영하 작가와 자기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물고기 이빨이 없어라. 그러나 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 한 점에도 괴로워'한 시인의 마음에 공명하는 인문학도가 아닌가.    



  ... 나는 오빠를 유디트, 에비앙, 미미보다 사랑하지.


얼토당토않은 질문은 인간의 파괴 욕구를 들끓게 한다. 차마 김영하 작가님을 저울에 올릴 수 없었던 나는 작가님의 작품(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청해 그 앞에 모셔다 뒀다. 그는 미적분과 사인, 코사인, 함수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기에 의미가 전달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니터에 시선을 둔 옆얼굴을 보니 일단 자기가 더 좋다니 만족스러워하는 듯했다. 에라이. 적당히 통역을 마친 나는 다시 책에 고개를 돌렸다. 오랜 연애는 설렘이 전부가 아님을 알 만큼은 살았다. 아, 산산이 흩어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흩어진 이름이여! 김소월 선생님이 통곡하고 가실 만큼 책에 관해서만큼은 맥락 없는 대화를 이어가던 나는 결혼 적령기 마지노선에서, 그 남자와 결혼이란 걸 했다.


결혼 후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둘 다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씀씀이가 크지도 않아 여유롭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려울 일도 딱히 찾기 어려웠다. 나는 여전히 읽기를 즐기는 사람으로 살았다. 문제는 아이의 출산과 함께 찾아들었다. 죄책감. 아이의 출산과 함께 엄마라는 정체성에 딸려 온 사은품 같은 죄책감 말이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성평등의 세상을 문자로 배웠음에도 언제 그 오래된 감정에 피폭된 걸까.  


출산 후 자발적으로 직장 생활을 내 생활에서 덜어냈다. 배낭 하나 덜렁 매고 중동과 세계 여러 나라를 쏘다니며 대학을 7년 만에 졸업한 나였기에 결혼도 육아도 내 세계에 발 디딜 일이 없을 거라 믿었다. 웬걸, 아이를 낳고 나니 온 세상에 아이밖에 안 보였다. 자연분만을 하겠다고 고집부리다 42주 3일 만에 응급수술을 거쳐 4.13kg으로 태어난 딸을 얻은 대신 두 달간 허리를 세울 수 없었다. 폴더폰 직각 모드로 모유수유 및 육아를 해내면서도 아이가 울면, 아이가 웃으면 만사오케이였다. 리처드 도킨스의 말대로 나는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출산 및 양육의 미션에 뭔가 씌어도 제대로 씌운 상태였던 건가.


하나였던 아이는 둘이 되고 둘로 시작한 가족은 넷이 되었다. 나의 깜냥은 두 아이를 동시에 품고 일상을 살기에는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어 친정으로 내려갔다. 연어가 회귀하듯 원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는 축복을 누리며 아이들과 함께 유아기를 살아냈고 너무나 바쁜 남편과 합의하에 주말부부 생활을 시작했다. 큰 아이가 4살이 된 무렵, 아이가 나와 함께 읽었던 그림책을 혼자 넘겨가며 보기 시작하자 눈이 뒤집힌 나의 책쇼핑이 시작됐다.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서 하숙집을 옮겨 다닐 때마다 300권이 넘는 책을 가장 먼저 모시고 이사를 다니던 나였다. 내 속으로 낳은, 나와 남편을 반반씩 닮은 신비로운 생명체인 내 아이가, 고 귀여운 손가락으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고 귀여운 입술로 낭랑하게 그림책을 읽는 목소리는 천상의 음악이었다.


매일매일 택배상자가 다녀갔다. 전집을 사지 않았기에 출산 후 나빠진 눈을 비벼가며 책을 골랐다. 낯선 곳에 가면 얼음이 되어버리는 아이는 도서관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더 열심히 책을 불러들였다. 유리 슐레비츠의 말대로 그림이 곧 언어인 그림책을 마음껏 누리며 나도 그 안에서 살았다. 내 아이가 책을 사랑하기를, 책 보면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는 사람들에게 밥과 떡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한 가치가 나옴을 당당히 알려주길, 그리고 아이가 앞으로 학교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동안 공부도 일도 잘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친정엄마가 그만 사라고 내지르시는 사자후를 귓등으로 흘리며 나는 담고 또 담았다.


이상하네. 그 많은 책을 사면서 내 책은 카트에 담지 못했다. 나의 퇴직으로 내 수입만큼의 수입이 줄어든 우리 형편에 맞춰 생활을 하되 친정에도 당연히 생활비와 용돈을 드려야 했다. 둘로 늘어난 아이들을 입히고 먹이고 놀 것을 쥐어주고 시기적절한 각종 계발을 해줘야 했기에 문화센터도 다니며 돈 나갈 구멍은 숭숭숭 늘어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책 한 권이 금값은 아니건만 아이들 책은 10권을 사도 괜찮은데 내 책은 한 권 담기가 망설여졌다.


괜찮아, 아이들 책 읽어주기도 바쁜데
내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어.
애들 좀 크면 나도 사서 보자.
그렇게 하자.


그때는 몰랐다. 아이들 책 읽어주는 기쁨과 내 책을 온전히 읽는 일렁임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아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키워야 혼자서 뭔가를 하기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내 아이의 행복과 따스함을 위해 사랑의 모닥불을 피우고 아이들을 품에 안아 그 불을 쬐어주는 일은 '나'라는 존재의 마음과 몸이 건강할 때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너무 쉽게 넘겨버렸다. 책을 사랑하던 사람이 영혼의 마중물을 계속 만나기 못하면 어느새 삶의 우물이 말라버린다는 사실을 겪기 전에 알지 못했다. 나에게 주는 그 한 권의 책과 책을 읽을 시간을 멀리 하는 대가는 지독한 우울과 투명한 망가짐이었다. 서서히 망가져 가는 마음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기에, 엄마는 원래 그런 거야,라는 오래된 관념의 덩굴에 온통 뒤덮여 갔던 시간.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덩굴을 걷어내고 다시 나의 우주를 걷는다는 뜻. 중간의 지난한 모든 과정 나열은 생략하기로 하자.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나를 회복하는 중이다. 내가 나를 돌본다. 나를 위한 책들이 품에 안길 때마다 펜을 들고 밑줄을 그으며 두텁게 덮여있던 죽은 껍질들을 하나씩 떼어나간다. 아프고 시리기도 하지만, 괜찮다, 새 살이 돋도록 나를 돌볼테니. 예전의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바라보고 흔들어 깨운다. 여전히 나에게 가장 소중한 페르소나 가운데 하나는 '엄마'이다.  '나'를 지우고 백지가 되는 일, 나는 이것이 내가 해내야 할 부모의 마땅함이라 믿는다. 내가 하얀 도화지가 되어주면 아이는 자신의 색을 탐구하고 선을 살피며 마음껏 실수하고 실패하고 좌절했다가 다시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물들고 젖어 찢기기도 하고 너덜거릴 수도 있지만, 괜찮다, 나는 이제 아이들을 원망하지 않고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 나를 회복하는 일을 좀 더 잘할 수 있으니까.


처음 엄마가 되어 '나'라는 책에 적힌 텍스트를 지우는 법을 몰랐기에, '나'라는 존재 위에 다른 종이를 덧대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나를 무수히도 괴롭히고 짓누르며 살았다. 그렇게 지독히 막막한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의 시간을 건너왔기에, 오히려 나는 앞으로도 아이들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들의 삶의 배경이 되고 싶다. 아이가 스스로의 빛을 찾아 헤매면 문득 칠흑 같은 밤하늘이 되고, 폭풍을 만나 비 속에 방황하면 무지개를 떠올릴 하얀 도화지가 되어도 좋겠다. 그러면서도 여기 보라고, 나를 보라고 아이의 시선을 한 곳에만 고집스럽게 잡아두지 않는 지혜를 지닌 엄마이고 싶다. 앙 다문 껍질 속에서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달라고, 내 울타리를 벗어나지 말라고 외치는 조가비 같은 엄마가 아니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읽고 쓴다. 읽고 쓸 때, 나는 나의 의지로 문장의 오솔길을 걷고 작가들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듣는다. 내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내 생각이 움트고 내 손을 통해 흘러나온 생각과 감정이 '글자'라는 옷을 입고 '문장'이라는 이웃을 만나 '글'이라는 세계를 이룬다.  나는 나를 낳는다. 나를 통해 이 세상에 초대되었고 언젠가 자신들의 항해를 떠날 아이들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깨어있는 시력을 지녀야 하고, 욕심과 편견으로 차단되지 않은 열린 귀를 가져야 한다. 나로부터 비롯한 두 개의 심장 같은 아이들이 떠난 후 , ''라는 우주가 공허감 대신 온전히 애썼다는 감사와 자라난 생명들에 대한 경외심으로 운행되도록 나는 나를 지키고 가꾸고 싶다.  


돌봄으로 불태운 당신, 주문하라. 우주먼지 지니 램프 상자이든, 24시간네네 상자이든, 우리나라 골동품 서점 상자이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을 들어 터치하자. 그리고 당신에게 데려오라. 당신의, 당신에 의한, 당신만을 위한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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