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사람들에게 그림을 시작할 때 ‘사물을 먼저 그려보라’ 고 말하는데, 이는 한 그림을 마음속에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 가치
초현실주의작가 마그리트의 <개인적 가치>라는 그림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자,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사물’을 그리기를 할 때마다 항상 이 그림을 떠올린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주로 평범하게 지나치는 일상의 장면들을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을 이용하여 그리곤 했다. "익숙하고 정든 고향에서 '추방'당하다"는 직역을, 미술적 용어로 해석하면 결국 '낯설게 하기'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익숙한 물건, 어울리는 장소, 본래의 색과 크기로부터 '추방'하여, 사물에 '변형'을 주는 것이다. ‘크기’의 변형, ‘재질’의 변형, ‘위치’의 변형 등이다. 사과가 집채만 하거나, 구름이 돌덩이 거나, 생선 머리와 사람 다리가 인어로 그려지는 상상. 그중에서도 나는 크기의 변형에 늘 주목했다.
자신이 ‘중요’하다 여기는 가치 있는 물건의 크기를 공간에서 가장 크게 ‘확대’하여 그리고 ‘가치 없는’ 물건은 더 ‘축소’하여 그려도 되는 초현실주의적 상상.
고등학교 시절 입시를 위한 포트폴리오를 만들 때 이 마그리트의 <개인적 가치>라는 그림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해석하여 패러디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마그리트의 <개인적 가치>라는 그림을 패러디 한 그림의 배경은 교실이다. 시간표에는 영어가 가득하다. 책상이 놓여 있고 영어 수업을 기다리는 마음에 영어 교과서가 바닥을 다 채울 듯이 놓여있다. 영어 선생님은 기타를 잘 치셨고, 헤비메탈을 좋아하셨다. 담배를 자주 피우셨는데 꼭 커피를 같이 드신다고 말한 적이 있으셔서 이따금씩 아침 일찍 등교하여 선생님 책상에 몰래 커피를 올려두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그 당시 나의 학창 시절의 큰 가치였기에 그 기억을 모두 밀집하여 그림을 그렸고 그렇게 타임캡슐처럼 '그 시절'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꽤 오래된 그림이지만, 원작을 가장 좋아하는 만큼, 내가 그린 그림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사물에는 기억이 담겨 있다.
물론 처음부터 의미 있는 사물을 그린다면, 사물과 관련된 기억을 보다 쉽게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선물을 받았거나, 어렵게 구했거나, 누군가와 짝을 맞췄거나, 특별한 곳에서 기념품으로 사거나 등등. 가만히 보면 <개인적 사연>이 깃들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듯, 물건을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외형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사물 드로잉을 할 때 시작하는 것은 주로 마시고 있는 눈 앞의 컵부터 그리기 시작하는데, 어떤 음료를 마시는지부터 우리는 아마 다 다를 것이다.
한 공간에 머문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텀블러와 각기 다른 필통을 소장하고 있는지 관찰하여 그려보았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적인 방식은 의외로 실질적인 본질주의적 방식으로부터 나오는데, 그것은 존재를 향하여 ‘왜 그러한가’보다 ‘왜 그러하지 않은가’를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물건의 나열은 ‘왜 이것을 샀는가’, 혹은 ‘왜 이것을 가지고 다니는가’로 해석하여 그릴 수 있지만 반대로, ‘왜 다른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은가’로 해석한다면 내가 쥐고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이나 당위성을 새삼 깨달을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건을 엿봄으로써 물건의 주인이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가령 내 파우치, 필통, 가방 속 물건을 꺼내어 흐트러진 그 모습을 그대로 그려보거나 나 홀로 순위를 매겨 보면서 물건들을 정렬해 본다고 하자.
내가 가진 물건들을 살펴본다는 것은 내가 가진 취향을 새삼 짚어본다는 것
내 물건들은 필요시 간편하게 꺼내어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것들, 크기 면에서 작은 것들, 문양이나 모양에서는 되도록 심플하나 가끔 포인트 문양이나 캐릭터를 좋아하기도 하는구나 하는 취향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일자 나열이나 크기에 따른 변형을 주면 마그리트의 개인적 가치와도 같은 그림이 탄생할 수 있다.
커피와 커피잔 그리기, 텀블러 그리기, 조명 그리기, 의자 그리기, 실내 식물 그리기, 책상 위 소품 그리기 등 관점에 따라 그릴 대상들은 무궁무진하게 달라질 수 있다.
사물이라는 것은 그것을 선택한 사람의 의견의 반영이다.
드로잉을 할 때 주로 공간을 그리며, 그 시간, 그곳에, ‘내’가 있었다를 남기는 편이지만 때때로 ‘나’의 물건, 혹은 나와 ‘관련’된 물건과 ‘주변’의 물건을 그리기도 한다. 사물이라는 것은 그것을 선택한 사람의 의견의 반영이다. 그래서 어떠한 물건도 사실 소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물을 그리기 위한 관찰이 중요한 것도 그러한 물건의 당위성을 찾아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지고 있는 파우치나 필통을 열어 새삼 자신과 물건의 상관성을 깨달으며 물건에 대한 애착과 자신에 대한 성향 파악을 확인할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모인 공간에서 하나의 주제(위 그림을 예로 들자면, 텀블러와 필통)를 가지고 타인의 취향을 엿볼 수도 있다. 이 좁은 공간 안에도 이렇게 다양한 취향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타인에 대한 마음가짐도 달라지게 된다. 다른 사람이고,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을 그려도 그건 ‘나’ 자신을 그리는 것
그림은 시작하고 싶은 곳에서 시작하면 되고 끝내고 싶은 곳에서 끝내면 된다. ‘프레임’을 정하는 것도, ‘소재’를 정하는 것도,‘생략’하는 것도 모두 나의 ‘선택’이다. 이 모든 것이 개인적이기 때문에 그림의 완성이라는 개념 역시 지극히 주관적이다. 무엇을 그리지, 어디를 그리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그리지, 얼마만큼 그리지, 무엇으로 그리지, 언제까지 그리지 등등…
데일리 드로잉(1일 1 그림)을 처음 시작할 때를 떠올리면 그러한 선택의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매일 카페를 옮겨 다니며 주변 곳곳의 카페를 그렸고, 그 재미도 나름 쏠쏠했다. 그러나 일상은 늘 반복의 굴레의 안에 있고 그 속에서 늘 '새로운 것'을 찾다가는 '소재'의 고갈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눈이 자꾸 예쁜 카페를 쫓기 바빴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꾸 어딘가 새로운 곳을 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기 시작해버렸다. 내가 아무리 활동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분명, '아무 곳도 가고 싶지 않은 날'이라던가 '오늘은 그냥, 가까운 그곳을 또 가고 싶은 날'들이 존재하기 마련인데도 불구하고. 그렸던 곳인데, 저번과 비슷한 구도 같은데… 라는 그 '반복'에 대한 회피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 어느 날, 문득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어디를 가든 무엇을 그리든, 오늘의 장면을 그린다는 것은 오늘의 ‘나’ 자신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곳에 있는 나, 내가 선택한 프레임, 오늘은 어떤 물건들과 연관 있으며, 지금 내 주변에 어떤 물건이 있고, 나는 그것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