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오늘 하루도 그림 한 장 끝냈네,라고 생각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면서 온도차로 커피잔에 맺힌 물방울을 툭-하고 스케치북으로 떨어트리고 만다.
기껏 그린 그림이 물 한 방울에 순식간에 번지며 사라지는 일은 지금껏 여러 번 경험해왔다.
방금 전까지 멀쩡했는데, 고작 물 한 방울로 순식간에 뒷장까지 잉크가 퍼져가며 아직 그림을 그리지 않은 뒷장까지 꼬박 14장이 번졌다. 자주 겪었던 일이라 이 정도 일에는 '아이고'라는 탄성조차 나오지 않는다.
태연하게 '잉크는 솔직하구나 물에 젖어드는 게'라는 글을 적으며 멀뚱멀뚱 잉크가 퍼진 자국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노트에만 벌써 두 번째 물을 번졌구나 라는 생각에 이전에 망쳤던 페이지 부분을 다시 한번 펼쳐보았다.
이때는 비가 왔던 날이라 가방이 젖으면서 노트까지 젖어버렸었는데, 그림을 그렸던 페이지들이라 8장 정도가 다 번지면서 그림을 망쳐버렸다.
오늘은 '잉크는 솔직하구나 물에 젖어드는 게'라면서 초연한 듯 글을 적었지만 이날은 기분이 좋지 않았나 보다. '비에 젖어 번진 잉크가 곰팡이처럼 기분을 좀먹었다'라고 적혀있었다.
그날의 기분이 갑자기 생생하게 다가왔다.
아 맞다 이날, 이날 나 우울했었어 라며 피식 웃었다.
곰팡이 핀 것 같이 기분이 좀먹었다는 표현처럼 그림이 번진 자국들은 꼭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그렇게 몇 페이지를 넘겨보는데, 유난히 하단에 있던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기록이 시가 되는 노트'인 이 노트는 페이지마다 시 제목이 쓰여있다.
내 기분을 좀먹었던 그날의 시는 '읽자마자 잊혀져 버려도'였다는 점이 묘하게 다가왔다.
얼른 이번에 번진 페이지 부분을 살펴보는데, 망친 그림 다음 페이지에 선명하게 찍힌 잉크 자국 아래로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이라고 적혀 있는 글귀를 본다.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와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이라는 페이지를 멋지게 번진 잉크로 장식해 버렸다.
나는 평소의 습관처럼 나와의 실없는 말장난을 시작한다.
'그리자마자 번져버려도'라든가 '기록하고 번지기를' 이런 식의 농담을 건네며 상황을 웃어넘긴다.
그리고 며칠 뒤 그 페이지는 또 그림으로 남겨진다.
잉크가 번져도 아쉽지 않은 건, 그림이 번져 사라져도 나는 그 하루를 지내왔고 그 하루를 기억하고 있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그리자마자 번져버려도, '계속' 기록하고 번지기를'이라는 말을 또다시 웅얼거려본다.
그린 장면은, 그래 내가 그날 여기 있었지를.
작게 남긴 메모들은, 그래 나가 그날 이런 기분이었지. 이런 일이 있었지를.
이 노트의 이름처럼 나의 하찮은 하루는 기록으로 시처럼 남겨졌다.
이 페이지는 어쩐지 마음에 들어 직접 시를 찾아서 일부분을 써보기도 했다.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도
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라며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
김을 담은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
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연인과 보냈던 흔하고 하찮던 순간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조차도 아름답게 기억되더라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라는 문장이 또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이전에 좋아했던 황경신의 시가 떠오르기도 했다.
뭔가가 시작되고 뭔가가 끝난다.
시작은 대체로 알겠는데 끝은 대체로 모른다.
끝났구나, 했는데 또 시작되기도 하고,
끝이 아니구나, 했는데 그게 끝일 수도 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아 그게 정말 끝이었구나, 알게 될 때도 있다.
그때가 가장 슬프다.
그리고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하던 날, 맨 뒷페이지에 적었던 글귀를 다시 들춰본다.
작년에 받은 노트를 지금에야
그때 못 봤던 것들을 이제야
기록해 두면 언젠가
그때는 그랬고, 지금 보니 이렇구나라는 게 기록의 매력이다.
기록해두면 언젠가.
다시금 마음에 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