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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미 Sep 06. 2021

너나들이

겨울을 잘 견뎌낸 나무가 부지런히 연두 빛 잎을 피워 올리면 시린 기억 저편에서 그녀가 말을 걸어온다. 너나들이가 되려고 우린 그리 싸웠을까. 언제쯤 이 기억이 곰삭을까.

 

 리모컨 지시에 무엇이든 척척 하는 로봇처럼 아이를 조종하려 했던 적이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거침없이 눌러 됐다. 내 속도에 맞게 제 나름의 길을 타박타박 잘 걸어가 공부가 맞는 아이인 줄 알았다. 소질이 있어 보이던 언어에 관련된 직업을 그려 보며 전후방 살피지 않고 돌진했다. 그렇게만 가면 한달음에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주부로만 살았기에 딸만은 직업과 경제력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일이 터졌다. 비틀거리고 미끄러지더니 넘어졌다. 엄마의 그늘에 가려진 딸애는 존재 증명을 위해 몸부림치며 거칠게 반항했다. 언제나 일방통행이었던 주입식 교육이 자양분이 되어 싹을 틔우지 못하고 곪기 시작했다. 주저리주저리 탐스럽게 영글어 가던 열매는 아무리 물을 주어도 시들시들했다. 때가 되면 알아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줄 텐데. 조급하게 익히려 해 생채기를 낸 것이다. 

 

 “엄마가 다 결정할 거면서 무엇 때문에 물어보는데......” 

 이 울림만이 맴돌 뿐.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대화의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스스로 상처를 내어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친구와 수시로 싸우기도 하고 학원을 빼먹고 거리를 방황하며 아무도 넘나들지 못하게 가시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도와달라는 손짓이었을까. 깊은 원망이었을까. 아마도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해 달라는 간절한 손짓이었을 것이다. 턱턱 막힌 숨을 뚫어줄 산소가 필요하다는 절규의 목소리를 왜 그때는 듣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잠시 머물다 지나갈 바람이려니 했다.

 

 “ 그렇구나,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만큼 지쳤구나. 네가 그렇게 힘든데 엄마가 몰랐구나.” 라며 등을 토닥이며 아이의 허기진 마음을 달래주어야 했다. 이런 마음으로 학원을 간들 무슨 공부가 되었겠는가. 어른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는데 아이야 오죽했을까.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만이라도 ‘네 편이다’라는 믿음을 줄 수 있었을까.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는 공감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을 뼛속까지 느꼈으리라. 아이의 입장을 헤아려 수시로 마음의 안녕을 물었을 것이다.   

 

 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나서야 에둘러 걷는 길도 있다는 걸 알았다.  “머리는 유전이고 극복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았으면 좋겠다.” 는 아이의 말은 내 가슴을 저몄다. ‘성적’이라는 벽을 허물고 마주 앉았다. 내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아이도 말문을 연다. 내가 못해 낸 일을 아이에게 해내라고 다그친 못난 엄마였다. 나는 내려놓기로 했다. 교육이란 아직 피어나지 않은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한 투자라고 했던가. 

  

요리에 관심이 많은 딸아이는 요리를 할 때는 참 열정적이다. 재료가 갖는 내적 독립성을 찾아 퓨전으로 창출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좁은 시각이 훤히 열리는 기분이다. 재료의 질감이 맛의 비결이라며 재료의 순 성질대로 순차적으로 조리하는 것을 보면 꽤 괜찮은 요리사 같다.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 도전을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한 발자국씩 옮기다 보면 소원하는 것에 가 닿으리라.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는 듯하다. 무엇을 하든 지켜보고만 있을 뿐 이제는 서두르지 않는다. 적성에 맞는 실질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잠재력을 찾아 주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싶다. 아니 스스로 찾을 수 있게 길을 터주는 것뿐이다. 이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스스로 뭔가를 결정 내리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서 자기만의 길을 잘 찾아가는 듯하다. 

 

 너나들이가 되려고 우리는 그렇게 싸웠을까. 요즈음 딸아이는 수다쟁이 엄마의 사연을 들어주려 애쓴다. 때론 다정했다 때론 정곡을 찔렀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는 명탐정 같기도 하다. 그러노라면 생채기 난 마음에 청정한 기운을 불어넣어 한 줄기 평화를 얻는다. 마음이 통하는 영화를 본 날은 내가 공감했던 최고의 명장면을 앞 다투어 예찬하느라 밤이 깊어 가는지 모를 때도 있다. 공감되는 부분이 일치하는 순간 더 멋진 친구가 된다. 공감이 이런 것이구나! 싶어 배시시 웃음이 난다.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아픔은 더 생생하듯 곰삭지 않는 그 기억은 마음 언저리에 눌어붙어 잊을만하면 소환되는 도돌이표가 되었다. 성적이 뭐라고 아이를 생각 없는 로봇을 만들어 분노를 가르쳤을까. 사람 사이에 소통이 되지 않는 것만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날려버릴 수 없는 페이지를 열어 오늘도 나는 반성문을 쓴다.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고 부딪히는 부분은 대화로 풀어 나갔다면 아프지 않고 수월하게 지나갔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선택의 순간은 끊임없이 올 것이다. 진정한 부모라면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지켜봐 주고 아이의 앞날이 순탄하도록 응원해주는 울타리가 되면 되는 것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끊임없이 배워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아로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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