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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 Aug 19. 2021

누구를 살려야 할까?

좁아지는 시야에 대하여

대학 시절 농촌 봉사 활동에서 학생회장 형이 '연대'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다. 나는 대학교 1학년 첫 농촌 봉사 활동이었고, 운동권이 뭔지도 모르는 신입생이었다. 연대가 뭔지 모르겠다고 하자 한 비유를 들어 주었다. 만약 농민 한 명과 내가 있고, 나는 우산을 들고 있는데 비가 온다고 해 보자. 이때 어떻게 하는게 연대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나는 같이 우산을 써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우산이 있고, 비가 오고, 사람이 두 명이라면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당연히 같이 우산을 쓰면 되지 않을까? 


그때 학생회장 형은 내가 가진 우산을 버리고 같이 비를 맞아 주는 것이 연대라고 했다. 그때 나는 사람의 정치적 본성이란 참 멍청하다고 느꼈다. 우산을 버리고 같이 비를 맞는 것이 연대라니. 과연 같이 비를 맞는 농민도 학생들이 자신과 연대한다고 생각했을까. 혼자 우산을 쓰지도 못하고, 같이 우산을 쓰자고 권하지도 못하는 바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미드 워킹데드를 보다가 문득 연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우산이 있고, 농민이 여러 명이라면? 학생회장 형이 말했던 것처럼 한 명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우산을 같이 쓸 수 있겠지만, 사람이 여러 명이면 모두에게 우산을 씌워 줄 수는 없다.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 명이라도 비를 맞지 않도록 해야 할까? 아니면 그 우산을 버리고 나도 같이 비를 맞아야 할까? 같이 비를 맞는다면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까?  


단순히 비를 맞는 것뿐이라면 내가 같이 비를 맞는 것이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같이 비를 맞으면서 우리는 힘든 상황을 함께한다는 연대감을 가질 수도 있겠다. 같이 비를 맞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미세 먼지가 가득 담긴 더러운 비를 맞더라도 집에 들어가서 씻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산성비라서 머리 빠질 걱정만 아니라면. 


그런데 만약 단순히 비를 맞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관련된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이 옳을까?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과 나 단 둘뿐이고, 그를 구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당연히 사람을 구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을 구하지 않고 같이 죽어야 한다고 말하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또다시 다른 생각으로 뻗어 나가서 여러 명의 사람이 죽음의 상황에 처해 있고, 나에게는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수단밖에 없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머리가 조금 복잡해진다. 포기하고 다 같이 죽어야 할까? 나 혼자라도 살아야 할까? 한 명만 구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엄청난 고민 끝에 한 사람을 구하기로 결정했다고 해 보자.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나는 누구를 구해야 할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어떤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것일까?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람들 중에 내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면 선택은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가족이나 친구가 한 명 있다면 그를 구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또 친하지 않은 가족 몇 명, 친한 친구 몇 명 이렇게 섞여 있다면 누구를 구해야 할까? 


또다른 가정을 해 보자. 세상이 멸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의 가족 한 명이 있고, 세상의 멸망을 구할 수 있는 사람 한 명이 있다. 가족을 구하면 나와 가족 한 명이 살아서 멸망하는 세상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살아가야 하지만, 세상을 구하는 사람을 살린다면 가족은 죽겠지만, 그 구원자가 세상 사람 모두를 구할 수 있다. 덤으로 나도 살아남는다.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까? 


지금의 나라면 아마 가족을 구할 것이다. 소중한 사람이 없는 세상은 살아갈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나를 기준으로 놓고 보면 어차피 가족 없이 혼자 살아남는 것이 의미가 없다. 하지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불합리한 일이다. 단 두 명이 살자고 세상 모든 사람이 죽으니 말이다. 이런 결정은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결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나는 가족이나 내 주변 사람들을 기준으로 판단을 해서 선택을 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살아갈 수록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도 점점 좁아져서 선택도 좀 더 쉬워진다. 농민과의 연대 따위.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 따위. 


그래서 나이를 먹다 보면 시야가 좁아진다. 나를 기준으로 삶의 반경이 점점 좁아지고, 그 반경을 지키기만 한다. 그래서 또 나이를 먹다 보면 더욱더 꼰대가 되나 보다. 좁은 반경을 지키며 좁은 시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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