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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혜진 Dec 23. 2021

은영

2021-06-11, 14

은영은 땅을 보고 걷는다. 어릴 적부터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습관이었다. 똑같이 이어지는 바닥이 마음에 잔잔히 깔리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보도블럭의 벌어진 틈새 사이로 피어난 풀꽃이나 말라 비틀어진 지렁이 같은 것들이 종종 은영의 눈길을 끌었다. 


주황빛으로 은은하게 일렁이던 하늘이 어느새 까맣게 가라앉았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걸음이가볍게 바닥을 울렸다. 은영은 자기 걸음소리에 맞춰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팔을 서늘하게 감싸는 밤공기를 즐기며 걸음을 서둘렀다. 여전히 은영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가로등이 닿지 않는 길은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아 보도블럭의 금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곳을 지날 때면 은영은 모험이라도 하는 듯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조리개를 제대로 조이지 않아 온통 까맣게 나온 필름 사진 한가운데를 횡단하는 것만 같았다. 


가로등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은영의 집이었다. 오래된 아파트의 현관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계단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타기보다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것을 좋아했다. 조금 가빠진 숨으로 문을 열자 갇혀 있던 어둠이 은영에게 물처럼 밀려왔다. 몇 안 되는 가구가 은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심하게 옷을 벗고 바닥에 그대로 몸을 뉘였다. 은영은 어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적막으로 목을 축였다. 은영은 완벽히 혼자였다. 


혼자인 자신이 이렇게 선연하게 떠오를 때 은영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다. 잠시 미동도 없이 누워있다가 몸을 짓누르는 적막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미지근한 물로 몸을 적시고 입 안 가득 물을 머금었다 뱉어냈다. 흠뻑 젖은 몸을 바싹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며 은영은 거울 속 몸을 훑었다. 목, 어깨, 가슴, 배, 허벅지에 차례로 텅 빈 시선이 닿았다. 가슴 안 쪽이 작은 소용돌이가 일은 것처럼 울렁였다. 맥박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머리도 멍해졌다. 은영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지 알고 있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은영이 천천히 손을 가슴에 얹었다. 손에 꽉 차는 가슴을 살짝 움켜쥐자 조금씩 몸이 달아올랐다. 


아직 물기를 머금은 피부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었다. 갈망하는 움직임이 배 속에서 끓어올랐다. 은영은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여린 살을 매만졌다. 한 손으로는 여전히 가슴을 움켜쥐고 곤두선 부분을 지긋이 눌렀다. 건조한 손길이 몸을 훑자 여기저기 흩뿌려진 외로움이 눅진하게 들러붙었다. 은영은 이를 떨쳐내려고 절박하게 손을 움직였다. 손길이 거세질 수록 갈망은 격하게 일렁였다. 


일순간 서늘한 밤공기가 은영을 관통했다.

어둠을 밟고 집으로 오는 길에 묻혀온 밤공기가 그동안 그녀의 안에 숨어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은영은 손길을 거두고 무력하게 침대 위에 늘어졌다. 온 몸을 휘감은 외로움이 더 진하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감각에 꼼짝 없이 묶여버렸다. 


은영은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이 견딜 수 없이 비참했다.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애를 써봐도 돌아오는 것은 결국 누추한 자신 뿐이었다. 은영은 더 이상 누군가를 바라고 싶지 않았다. 원할수록 자신은 텅 비어 가기만 했다. 누군가와 닿는다고 해서 채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빈틈없이 서로를 껴안고 있을 때도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그녀는 알았다. 


언젠가 허름한 모텔에 누워있던 자신의 모습이 겹쳐왔다. 버석한 이불과 좁은 공간보다도 황토색의 벽이 빙 둘러있던 것이 끔찍이 싫었다. 놓칠까 두려워 매달려 있던 팔에 고개를 파묻고 속삭였다. 


개미가 된 것 같아


묵직하게 내려 앉은 가슴이 겨우 뱉어낸 말이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갈 곳 잃은 마음이 허공에 흩어졌다. 은영은 깨달았다. 서로에게 절대 닿을 수 없다는 것을. 


무력한 곤충처럼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의 모습이 눈 앞에 떠올랐다. 이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은영은 작은 손으로 자신을 끌어 안았다. 심장 소리가 작게 귓가에 울렸다. 이대로 가라앉고 싶었다. 적막이 요람이 되어주자 은영은 눈을 감았다. 오로지 자신의 심장소리에만 의존하여 숨을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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