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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Apr 1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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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이미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길 기분이 아니었다. 지윤은 심각한 표정으로 쭈그려 앉았다. 뒤이어 얘기를 전해 들은 선우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담뱃갑을 주머니에 신경질적으로 쑤셔 넣고 나가 버렸다. 사정을 알리 없는 아이들만 케이크 위에 초콜릿 장식을 누가 먹을지 실랑이를 벌였다. 


  이사오던 날에 지윤은 실없는 사람처럼 비죽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이 집은 일층이었고 새 집 냄새가 났다. 페인트 냄새와 약품 냄새가 흐릿하게 남아 있는 거실에는 흰색 실크 벽지가 발려 있었다. 앞뒤로 널찍한 베란다가 있고 주방에는 절수 패드가 있었다. 24평이라서 안방을 제외한 나머지 방이 볼품없이 작았지만 네 식구가 살기에는 충분했다. 


 뒷 베란다 바로 앞은 어린이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그곳에서 놀다가 엄마를 찾을 일이 생기면 베란다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서 엄마를 불렀다. 그러다 보니 지윤의 집은 동네 아지트가 되었다. 꼬마들이 놀다가 화장실이 급하거나 목이 마르면 지윤의 집을 두드렸다. 아이들은 작은 새처럼 종알대고 재잘거리며 지윤의 집을 들락거렸다. 지윤의 집에는 아이들만 복작거린 것이 아니었다. 이웃 엄마들도 자주 지윤의 집을 찾았다. 그들은 놀이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가 지윤의 집에 놀러 와서 커피나 삶은 고구마를 나눠 먹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제 엄마를 찾는 소리가 들리면 다시 놀이터로 나가는 것이었다. 


 이사 오기 전 살던 집은 강변북로 옆에 낡은 아파트였다. 아파트 창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끝도 없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는 차들이 정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창문을 열면 매캐하고 텁텁한 매연이 실내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누수였다. 장마철에 비가 새기 시작했는데 누수 지점을 찾지 못했다. 결국 일주일이 넘게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위 층 세대를 이 잡듯이 뒤져서 겨우 원인을 찾았다. 그동안 잠을 설친 지윤의 얼굴에는 짙은 기미가 내려앉았고 지긋지긋하도록 고생을 한 덕분에 지윤은 집에 정이 다 떨어졌다. 


 전에 살던 집이 시커먼 자동차 매연을 연상시키는 집이라면 이 집은 아이들의 해사한 웃음소리를 연상시키는 집이었다. 실제로도 집 안에는 놀이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지윤은 이 집이 좋았다. 동남향이라서 아침 일찍부터 거실로 새어 들어오는 우윳빛 아침 햇살도 좋았고 집에서 나는 새 집 냄새도 좋았다. 지윤은 집안을 수시로 쓸고 닦으며 애지중지했다. 입주 후 하자 보수를 받을 때도 지윤만큼 꼼꼼하게 하자보수를 챙긴 집은 없었다. 지윤은 거실 앞쪽으로 난방선이 지나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끈질기게 바닥 보수를 요구했다. 덕분에 500세대가 넘는 가구 중에서 거실 바닥을 뜯어내고 새로 난방공사를 받은 집은 이 집이 유일했다. 거실 가구에 비닐을 뒤집어 씌우고 이틀 동안 먼지를 톡톡히 뒤집어쓰면서도 지윤은 뿌듯한 심정으로 공사 현장을 지켜봤다. 


   집주인은 구로에 산다고 했다. 그들은 계약을 할 때 자기들은 들어와 살 계획이 없으니 오래 살라는 말을 덕담처럼 덧붙였다. 그래서였을까. 지윤은 이 집에 대한 애정을 점점 키워 오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이 집이 마치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것 같은 강한 집착을 느꼈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망상과 착각이었던가. 집주인의 전화 한 통에 무너져 버리는 망상을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지윤은 방심한 채 공격을 당한 격투기 선수처럼 비틀대고 있었다. 아파트 앞 버스 정류장에는 회사로 가는 버스가 5분 간격으로 있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은 길 건너에 있었고 아이들은 이제 겨우 제대로 된 친구를 만드는 중이었다.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던 게 불과 얼마 전이었던가. 지윤은 이 곳을 떠나야 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어쩌면 그것은 지윤의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이었다. 1억 5천이라는 돈은 지윤의 형편으로는 융통이 불가능한 돈이었다. 적금을 깨고 보험계약을 해지하더라도 5천 이상은 불가능했다. 지윤은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닫아 버렸고 선우는 통 잠을 자지 못하는 눈치였다. 새벽에도 부스스하게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는 그의 모습은 혼이 나간 사람 같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선우였다. 우리 이사 가자. 선우가 그 한 마디를 힘겹게 꺼냈을 때 지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윤은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할 것처럼 입술을 실룩였다. 그러나 지윤도 이내 고객을 끄덕였다. 선우의 턱으로 거뭇하게 올라온 수염이 며칠 사이에 선우의 얼굴을 딴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그래. 이사 가자. 지윤은 결심을 굳힌 것처럼 천천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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