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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Apr 15. 2021

세입자(3)

단편소설


  어차피 본인의 집도 아니었으니 언젠가는 떠날 집이었다. 전세금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아 이사를 가는 것은 흔한 일 중에 하나였고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지윤은 부당한 일을 겪은 것처럼 억울하고 좌절했다. 나중에는 자기 집에서 내쫓기는 사람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언제까지 신세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우와 지윤은 주말에 집을 보러 다녔다. 물론 그 동네는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고 30분 넘게 서울 외곽으로 빠지면 돈에 맞는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지윤은 몇 집을 구경하고 바로 계약을 해 버렸다. 어차피 전세 계약을 하고 몇 년 살다 떠날 집인데 하나하나 따지는 것도 피곤하고 의미 없다 싶었다. 


 이제는 새로 들어올 세입자를 구해야 했다. 그 날부터 매일 집을 청소하고 집을 보여주는 지루한 일이 시작되었다.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어느 날은 두 팀이 보러 오는 적도 있고 주말에는 아침부터 집을 보러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을 보러 와서 열심히 둘러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다가도 막상 계약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제기하는 불만은 집이 1층이라는 것이었다. 1층이니까 프라이버시가 없다는 것이고 로얄층과 같은 시세로 집을 내놓았으니 기왕이면 좋은 층에 있는 집으로 가겠다는 것이었다. 


  집을 청소하고 보여주는 일이 기약 없이 반복되자 지윤은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매일 낯선 사람들이 집을 보러 오는 것도 불편한데 어떤 사람들은 온 김에 화장실 볼일까지 보고 나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낯선 사람들과 부동산 사장들이 들락거리자 이제 이 집이 공공장소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지윤은 참다못해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인 여자는 건조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지윤은 용건을 꺼냈다. 사람들이 집을 보러 뻔질나게 들락거리는데 보기만 하고 계약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세를 조정해야 빨리 나가지 않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을 했다. 그러나 집주인의 태도는 냉담했다. 마침내 지윤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지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저희도 어쩔 수 없이 이사 갈 집을 구하고 계약까지 했습니다. 6년간 잘 살았으니 문제없이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 

 지윤의 목소리가 그렇게 팽팽해진 것은 처음이었다. 그전까지는 어떻게든 집주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 전세금을 돌려받기까지는 자신이 '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조심스럽던 지윤도 주인 여자에게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에 전세금 인상을 통보하는 사람이라니 알 만하다 싶었다. 1층 집을 로얄층보다 더 비싸게 전세를 받으려고 하니 누가 선뜻 계약을 한단 말인가. 지윤은 계속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내용증명을 보내겠다고 경고하듯이 말했다. 집주인은 지윤이 따지고 드니 기세가 꺾였다. 나중에는 당황한 기색도 엿보였다. 주인 여자에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지윤은 통쾌함을 느꼈다.  


  지윤의 집을 들락거리던 부동산 사장 중에 창대 부동산이라는 이름의 부동산 사장이 있었다. 그는 키가 크고 화려한 셔츠를 즐겨 입는 남자였다. 얼마 전 집을 보러 왔을 때 그는 주방 바닥에 긁힌 부분을 발견했다. 이삿짐 업체에서 수납장을 나르다가 바닥에 생긴 자국이었다. 바닥이 밝은 원목 색깔이라 그 자국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지윤도 처음 바닥에 상처가 생겼을 때는 그쪽으로 지나갈 때마다 속이 상했다. 그러나 새 집도 몇 년을 살면 자연스럽게 헌 집이 되는 법이고 주방 바닥의 상처도 눈에 익었는지 더 이상 거슬리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산 사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몰래 나쁜 음모를 꾸미는 사람처럼 흐뭇하고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한참이나 주방 바닥을 보는 것이었다. 지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창대 부동산 사장이 가고 나서도 별 다른 일은 없었다. 지윤은 자신이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했다. 지윤은 애써 그런 불안을 털어 버리려 애를 썼고 며칠이 지나서는 창대 부동산 사장의 눈빛도 거의 잊어버렸다. 


 그런데 주인 여자에게 전화가 왔다. 주인 여자는 집을 보러 오겠다고 했다. 6년 동안 집을 어떻게 하고 살았는지 확인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 여자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당당하고 의기양양했다. 그 목소리 뒤로 창대 부동산 사장의 능글거리는 눈빛이 겹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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