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리게 걷기 Apr 21. 2021

세입자(6)

  다음 날부터 주인 여자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주인 여자의 공격은 문자 폭탄이었다. ' 새 아파트에 들어와 살았으면 원상 복구하고 나가야 할 거 아니냐.' 주인 여자는 그런 문자를 시도 때도 없이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답장을 보내다가 지윤도 질려 버렸다. 나중에는 그냥 문자를 무시했다. 주인 여자는 점점 더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지윤도 일관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 주방 바닥을 보수하고 나갈 거다. 그러나 거실 바닥까지 교체하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


   주인 여자는 새로운 문자를 보내왔다. 이번 문자는 법원 판례였다. 법원이 세입자에게 건물 원상복구 비용과 정신적 피해 비용까지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린 기사를 캡쳐한 문자였다. 주인 여자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법원이 이렇게 원상복구 의무를 세입자에게 부과하는데 언제까지 나 몰라라 할 거냐.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하냐'

 

  둘 다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전은 오래 갔다. 주인 여자가 먼저 타협안을 제시했다. 서울시 중재위원회에 가 보자는 것이었다. 서울시에 임대차 중재위원회란 게 있는데 변호사가 임대차 관련 사안에 대해 심리해 주는 기관이었다. 비용은 무료였다. 지윤도 동의했다. 매일같이 주인 여자의 문자 폭탄에 시달리느니 어서 빨리 상황을 해결하고 싶었다. 설령 중재위원회에서 집주인의 손을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싶었다. 차라리 법적으로 판결을 받게 되면 속이 편할 것 같다 싶기도 했다.



심리 날짜는 일주일 뒤였다. 중재위원회에는 변호사와 서기가 있었다. 지윤이 먼저 진술을 시작했다. 지윤은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중간에 감정이 복받쳐서 잠시 말을 멈춘 적이 있었지만 대체로 할 말을 다 했다. 주인 여자는 지윤이 말하는 동안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었다. 어서 지윤의 말을 반박하고 자신의 주장을 펴고 싶은 눈치였다. 그녀는 자신의 억울함을 주로 호소했다.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모르겠다는 하소연도 했다. 지윤과 주인 여자의 진술이 끝나자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 이번 사안에서는 집주인의 요구가 무리한 요구로 판단이 됩니다. "

주인 여자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 무리한 요구라니요?"

" 세입자가 성실하게 시설물 복구를 하겠다고 하는데 집주인이 수용을 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주방 바닥에 긁힌 자국이 있다고 해서 거실 바닥 전체를 교체하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

" 아니, 제 말을 들어 보세요. 전세 계약서에도 원상복구 의무에 대한 조항이 있어요"

주인 여사는 변호사의 말을 잘랐다

" 저를 설득하려고 하지 마세요. 세입자는 전세 보증금을 내고 살고 있습니다. 그 비용에는 감가상각비용이 포함된 겁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세입자 아이가 벽에 크레파스로 낙서를 잔뜩 해 놓았다고 합시다. 그 경우에도 집주인이 고의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세입자는 원상복구 의무가 없습니다. 건물의 원상복구 의무라는 것은 영업용 건물에 적용되는 법규이지 일반 주거 건물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에요. "

주인 여자는 당황한 것 같았다.

" 만약에 그러니까 내가 동의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 동의하지 못하면 민사소송으로 가게 됩니다. 확실한 것은 이번 상황에서 집주인이 이길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 경우 세입자에게 민사소송 비용과 정신적 피해보상까지 해야 합니다. "

주인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지윤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중간에 끼어들 틈도 없었다. 처음부터 주인 여자가 너무 흥분해 있는 바람에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주인 여자는 이제는 지윤이 아니라 변호사와 대결이라도 하는 것처럼 변호사에게 계속 날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변호사가 다시 질문을 했다.

" 세입자가 주방 바닥을 보수하겠다고 하는데 계속 반대하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주인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 저는 집을 수리할 생각이 없었어요. 제가 들어와서 살 것도 아니니까요. 그냥 100만 원 받고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세입자들이 얼마나 답답한지 말귀도 못 알아듣고 저렇게 바닥을 수리하겠다고 하니 이 난리가 난 거죠"


지윤은 생각지도 못했던 집주인의 의도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주인 여자가 바란 것은 주방 바닥 수리도 거실 바닥 수리도 아니었다. 그저 현금 100만 원을 챙기는 것이 그녀의 희망사항이었다. 주인 여자는 현금 100만 원을 받기 위해서 이런저런 생떼를 부리고 억지를 쓰면서 돈을 뜯어 내려고 했던 것이었다. 애초에 주방 원목 바닥 색깔을 맞추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던 것이다. 지윤은 허탈한 심정으로 주인 여자를 바라보았다.


심리는 끝이 났다. 변호사는 세입자가 거실 바닥은 물론 주방 바닥조차도 교체할 의무가 없다는 내용으로 심리를 끝냈다.


  주인 여자는 출력해 온 종이 뭉치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판례와 기사를 검색했는지 종이 뭉치는 두툼했다. 지윤도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시청 1층은 널찍한 로비였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주인 여자와 지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주인 여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 저 사실은 좋은 사람이에요. 저 사실은 간호사고요. 아픈 사람을 돌봐 주는 사람이에요"

지윤은 뭐라고 대답할지 알 수 없었다. 지윤은 어색한 표정으로 주인 여자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주인 여자는 샤넬 가방을 메고 있었다. 가방은 판례와 기사를 출력한 종이뭉치 때문에 불룩해져 있었다.


  주인 여자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아이처럼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지윤도 밖으로 나왔다. 로비 밖으로 나오니 이른 봄의 환한 빛이 쏟아졌다. 눈이 부셨다. 지윤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주인 여자가 걸어간 곳과 반대 방향이었다. 봄바람이 희미하게 불어오고 있었다.  





10년 전에 겪었던 소설 같은 일을 글로 써 봤습니다. 집주인에게 두 달 넘게 시달리고 정신 쇠약증이 걸릴 지경이었는데 중재 위원회를 통해서 간신히 구제를 받았습니다. 한 가지 바보 같았던 점은 이런 판례에도 불구하고 주방 바닥을 새로 교체해 주고 이사를 나왔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중간에 집주인이 주방 바닥만 교체하는 것에 동의를 하는 바람에 주방 원목 자재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물건을 환불할 수 없어서입니다. 결국 판례 상으로는 아무런 법적인 의무가 없었지만 주방 바닥을 새 원목 바닥으로 교체해 주고 이사를 나왔습니다. 집주인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규정하고 싶어 했습니다. 과연 좋은 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입자(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