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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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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Apr 19. 2021

세입자(5)

  지윤은 주인 여자에게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주인 여자가 두 번이나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 정도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저 좀 무례하고 경우가 없는 사람이려니 생각했고 살다 보면 주변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불쾌한 사람 정도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찾아온 주인 여자가 거리낌 없이 지윤과 눈을 마주쳤을 때 지윤은 분노를 느꼈다. 그녀는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표정은 전혀 미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아무리 집주인이라고 하더라도 예고도 없이 들이닥쳐서 안방에 깔린 전기매트를 들쳐 보라고 하다니. 지윤은 6년이나 살아온 이 익숙하고 다정한 집조차도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 집에서 예전처럼 편하게 생활할 수는 없었다. 무심코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집 어딘가 고장이 나거나 문제가 생겨서 주인 여자에게 약점을 잡히게 될까 봐 두려웠다. 집이란 사람과 닮아서 예고도 없이 고장이 나거나 삐걱거리기 마련이지만 지금은 그런 평범한 일들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때였다. 적어도 이 집에서 이사를 나가기 전까지는 수도도 전기도 바닥도 변기도 그 무엇도 고장이 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지윤은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 같았다. 아이들에게는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문 닫는 소리만 크게 들려도 확인하러 달려갔다. 


   이제 선우가 적극적으로 수리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주인 여자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고 지윤의 노이로제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긁힌 마루와 그 주변 마루 일부를 교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주인 여자가 반대했다. 그렇게 원목 바닥 몇 장을 교체하면 주방 바닥이 보기 싫으니 부엌 바닥 전체를 교체해야 한다고 했다. 


  한 뼘 정도 긁힌 자국 때문에 부엌 바닥 전체를 새 것으로 교체하라니. 지윤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주인 여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둘은 몇 번이나 전화통화를 했지만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주인 여자는 계속해서 주방 바닥이 보기 싫어질 것을 걱정했다. 지윤과 주인 여자가 통화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둘의 언성이 높아지는 일도 자주 생겼다. 지윤도 이제 오기가 생겼다. 그러나 억지를 부리는 사람을 이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선우는 그냥 주인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해 주자고 했다. 보아하니 주인 여자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자꾸 부딪혀 봐야 우리만 힘들 뿐이다. 그냥 원하는 대로 해 주고 마음 편하게 이사를 나가자고 했다. 

 하기는 고약한 집주인들의 얘기가 종종 들려오곤 했었다. 마지막까지 세입자에게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살면서 고장 난 뭔가를 수리해야 한다고 몇 백만 원을 제하고서야 전세금을 돌려주는 집주인의 이야기도 있었다. 결국 전세금을 고스란히 돌려받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지윤은 완전한 '을'이었다. 



  지윤은 남편의 말대로 주방 바닥을 새로 교체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비용은 50만 원이었다. 그나마도

아는 사람 중에 건설사 직원이 있어서 싸게 견적을 받은 것이었다. 지윤은 주인 여자에게 전화를 해서 상황을 전달했다. 마침 원래 바닥과 같은 자재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그래서 같은 색깔의 원목으로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전했다. 물론 거실 바닥은 몇 년간 사용하면서 색깔이 짙어졌기 때문에 같은 원목이라도 주방과 거실에는 미세한 색깔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말도 전했다.


  그런데 주인 여자의 반응은 이상했다.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토록 색상 차이 때문에 걱정을 하던 사람이라면 같은 색상의 원목 자재를 구했다는 소식에 다행이라거나 기뻐하는 내색을 보일 법도 한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지윤이 앞으로 어떻게 공사를 진행할지 설명하는 것도 그냥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숨소리로 주인 여자의 기분이 썩 좋지 않다는 것 정도만 추측할 수 있었다. 


  주인 여자는 말없이 듣고만 있더니 다음날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 내가 좀 알아봤는데 주방 바닥만 공사를 하면 안 된다고 하네요. 거실과 주방 바닥의 색깔이 서로 맞지 않다는 거예요. 거실과 주방 바닥에 결국은 경계가 생긴답니다. "

" 그건 저도 말씀드렸는데 미세한 차이기 때문에 보기에 이상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

"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주방하고 거실이 색깔이 다르면 보기가 안 좋죠"

"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신가요?"

" 주방 바닥 공사를 하는 김에 거실 바닥까지 공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전문가들이 같은 대답을 합니다. "

" 저도 전문가들한테 확인한 거예요. 집으로 와서 현장을 보고 견적을 내고 상담을 받은 겁니다"


그러나 주인 여자는 이미 지윤의 설명을 듣지 않고 있었다. 이쯤에서 지윤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새 아파트에 들어와서 살았지만 6년을 살았으니 엄연히 따지면 이 아파트도 이제 새 아파트는 아니었다. 그런데 아파트를 다시 새것처럼 만들어 놓으라는 것이었다. 주방의 긁힌 자국을 복구하기 위해서 주방과 거실 전체 바닥을 교체하는 작업을 하라니. 지윤은 억울한 마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주인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쓰고 있었다. 마치 엄마에게 사탕을 사 달라고 바닥에 아예 누워 버리는 작은 계집아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윤은 그녀의 엄마가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윤은 흥분으로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인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침착해졌다. 그녀는 지윤의 반응까지 이미 계산하고 있었던 것일까. 주인 여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주방 바닥을 공사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거실까지 다 공사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알고 다시 알아보세요. 


  주인 여자와 통화를 끝내자 지윤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지윤은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누워 버리고 싶었다. 상황에 대해서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했으므로 이성적인 사고를 더 이상 해 나갈 수 없었다. 퇴근하고 들어온 선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둘은 앞이 보이지 않는 숲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숲 속을 빠져나가려면 길을 찾아야 하지만 길은 보이지 않았고 길이 있는지 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둘은 어둠 속 무성한 숲 속에서 완전히 갇혀 버렸고 나갈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므로 두렵고 무기력했다.  


 둘은 극도의 불안감과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슬픔과 좌절이 뒤섞인 감정이었고 일어서려고 할 때마다 무릎을 꿇게 만드는 거칠고 무서운 손이었다. 그래서 둘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겹게 일어설 때마다 그 거친 손아귀에 잡혀서 다시 내리꽃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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