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비드 실즈, 김명남 옮김, 문학동네.
책을 사지 않은지 오래다. 어지간하면 빌려 읽는다. 열심히 사 모은 책을 집을 줄여 이사하는 과정에서 처분할 수밖에 없었던 20여 년 전의 경험 때문이다. 집을 줄일 정도로 큰집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17평 전세 아파트에서 친정집 방 한 칸으로 살림을 줄여야 했었다. 다른 살림은 친정과 우리 것 둘 다 쓰거나 둘 중 낡은 것을 버리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는데 제일 골칫거리가 책이었다. 꾸역꾸역 들여놓을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대거 처분하기로 했다.
꾸준히 모으기로 결심하고 정기 구독했던 문학동네 창간호부터의 시리즈를 선배에게 통째 보내는 등 책을 떠나보낼 때 꽤 아쉬웠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그중 내가 다시 펼쳐 본 책은 없었다. 그때 든 생각, "굳이 소장할 이유가 있을까?" 언젠가 다시 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그 많은 공간을 차지하게 하는 것이 과연 현명할까? 입지 못할 옷으로 옷장을 가득 채우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리하여 결심했다. 앞으로 책은 일단 사지 않는 것으로 하자. 될 수 있으면 빌려 읽고 빌릴 수 없을 때만 사자. 아무리 갖고 싶은 책이 보여도 일단 빌려보고 나중에 다시 찾게 될 경우에만 사자.
이후로 나는 이 약속을 꽤 열심히 지켜온 편이다. 아이들 책은 아끼지 않고 샀지만 내 책은 거의 사지 않았다. 심지어 석사 논문을 쓸 때에도 최대한 빌려서 봤다. 필요한 책은 거의 다 있었던 성남시립도서관의 장서 구색에 감사와 감탄을 보낸다. 도서관만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나라도 당당한 문화 선진국임을 피부로 느꼈다. 성남시 도서관 만세!!, 대한민국 도서관 모두 모두 만만세!!!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방금 주문했다. 오늘 저녁에 도착할 예정이다. 2018년 당시에도 빌려 읽었고, 이번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어제 퇴근길에 비를 뚫고 가서 다시 빌려왔는데, 앞 10여 페이지를 읽고는 소장하기로 결심했다. 명문이어서도 아니고 깊은 감동이 있어서는 더욱 아니다.
간결한 문장과 적재적소에 배치된 유머, 아버지의 전기와 자신의 자서전을 이토록 의뭉스럽고 능청스럽게 버무려낸 작가의 재치와 필력에 두 손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을 나의 롤 모델로 삼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쓴다면 딱 이런 책을 쓰고 싶다.
무엇보다 이 책의 글 조직 방식이 무척 새로운데 제법 흥미롭다. 과학 교과서인지, 해부학 이론서인지, 가족 에세이인지, 평전인지, 건강 칼럼인지 특정할 수 없는 장르인데, 읽다 보면 작가와 아버지의 인생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구축된다.
성장기 시절 누추한 육체와 끓어오르는 욕망 사이에서 벌여야 했던 필자의 눈물겨운 사투와 피할 수 없는 패배를,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규칙적인 운동과 절제된 식사를 실천한 아버지의 생존 기계라 할 만큼 정돈된 삶을 나란히 보게 된다. 친창인지 욕인지 부러움인지 지겨움인지 특정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따라 느끼며 끝까지 읽고 나면, 이제는 드디어 죽어서(!) 관 속에 있을 그 아버지의 묘지에 나도 한번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니 이 책을 내방 내 책꽂이에 모셔 놓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97세 아버지(1910년생)에게 한시바삐 수의를 입히지 못해 안달이라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작가, 데이비드 쉴즈.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미워하고, 아버지가 영원히 살기를 바라지만, 내일 당장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써낸 아버지의 전기이자 작가 자신의 자서전이다. 상호 대칭적 자서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언어와 스포츠라는 공통된 축을 기준으로 자신과 아버지의 비슷하면서도 상반되는 삶의 여정과 가치관을 그려낸 글이다.
쉴즈는 1956년생이고 브라운 대학을 졸업하고 아이오와 대학에서 예술학 석사를 했고 여러 권의 소설과 에세이를 낸 작가이자 뉴욕타임스 매거진 등에 글을 기고하는 칼럼니스트였다. 현재는 워싱턴 대학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아버지는 1910년 생이다. 현재는 각종 연금과 지역 신문에 스포츠 칼럼 쓰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으나, 과거 2차 대전 참전, 주말 야구 심판, 구단 매니저, 노동조합, 복지센터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자신의 뜨거운 피를 밤낮으로 불태우며 수컷이 가진 기본적인 욕망에 충실했다. 그 와중에 틈이 나면 (?!) 가장의 의무에도 눈을 돌리곤 했던 사람이다. 아들이 아무리 어릴지라도 절대 아들에게 져주지 않는 아버지였고 외모와 연애에 있어서만큼은 90이 넘어까지도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는 아버지였다.
전체적으로는 인간의 잉태, 임신, 출산, 성장, 죽음 등에 대한 각종 통계와 과학적 사실들과 유명한 사람들의 경구 등을 잔뜩 가져와 조합하여 글 내용의 90%를 채웠다. 너무 많고 너무 다양하여 출처를 밝히지도 않았고 독자 입장에서도 굳이 출처를 확인하고 싶지도 않다. 잡다한 듯하지만 모두 꽤 의미 있는 팩트들이고 참고할 만한 수치들이자 울림이 있는 경구들이다. 그 중간중간에 자신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넣었는데, 간결하지만 단호한 문장으로 소개되는 이들의 이야기가 우디 알렌식 유머인지 유대인식 유머인지 미국식 유머인지 모르나 꽤 재미있다.
예를 들어,
책의 첫 장 두 번째 글의 제목이 ‘쇠락 1’이다. “포유류는 모두 나이를 먹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여 신생아에서 노인까지 수면 시간, 호흡 횟수, 치아의 교체, 연령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손톱의 성장 패턴까지 마치 과학 교과서처럼 상세히 서술한다. 그러고 나서 가장 마지막에 “속설과는 달리, 아버지, 당신이 죽은 뒤에 손발톱과 머리카락이 계속 자라는 일은 없답니다.”라는 문장으로 아버지에게 모종의 쐐기를 박는다.
죽고 나서도 손발톱 계속 자라는지에 대해 아버지와 수 차례 언쟁을 했어야 했던 모양이다. 아무리 말을 해도 아버지의 믿음은 변치 않았을 것이고, 이런 사소한 문제로 이렇게까지 피곤하게 언쟁을 이어가고 있는 자신에게조차 짜증이 났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이런 경험 있지 않은가. 오죽하면 작가는 책에서까지 아버지에게 쐐기를 박아버렸겠는가.
딱 집어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리뷰를 더 길게 쓰는 것이 이 책에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아버지에 대한 글의 극히 일부분을 소개하면서 핵심어를 표시하는 작업으로 마무리할까 한다.
이런 문장에서 핵심어 찾기 놀이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은근 설레고 재미있을 것이다.
- 아버지는 어느 나이든, 10세이든 90세이든, 미사일처럼 정확하게 쾌락을 추구했다.
- 아버지는 내게 인간냉동보존술의 비용과 타당성을 조사해보라고 했다. 아버지는 죽을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영원히 죽어있을 마음은 없다.
-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인에게 아름다운 처녀와 동침하라고 권했다. 아버지는 대학교로 나를 찾아왔을 때 내 여자 친구는 거의 무시한 채 여자 친구의 룸메이트에게만 집중하면서, 계속 ‘굉장히 매력 있는 젊은 여성’이라고 불렀다.
- “죽는 건 쉽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그건 하잖니. 사는 게 재주지.”
- 아버지의 물건은 내 것보다 좀 짧은 게 확실하지만(점잖게 엿보았다), 눈에 띄게 듬직하다. 아버지가 대단한 섹스광이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다.
- 손아귀 힘은 30세까지는 증가하고, 40세가 넘으면 급격하게 약해진다. 65세가 넘으면 아래팔과 등의 근력이 줄어든다. 힘이 약해진다기보다 조정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50세가 넘으면 가령 오래 자동차 핸들을 돌리는 것 같은 힘쓰는 일이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나 내 아버지는 60대 중반까지도 팔씨름에서 나를 이겼다.
-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쯤 지난 때인 70세에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 엄마하고 25년 살 때보다 세라(아버지의 새 애인)하고 보낸 올해가 훨씬 활동적이었다. 하룻밤에 한 번만 하는 것도 아니야.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밤 두세 번 하고서 아침에도 또 하지.”
- 15년 전 어느 화창한 봄날에, 아버지와 나는 동네에서 조깅을 했다. 중학생 소녀들을 태운 학교 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가슴을 부풀리고, 발을 더욱 높이 차며, 자태를 과시했다. 소녀들은 우우거리거나 아아거리거나 휘파람을 불거나 박수를 치거나 무시하는 대신, 버스 뒷유리창에 이마를 붙이고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짓을 했다. 소녀들은 비웃었다.
- 90세가 되면 여성의 3분의 1과 남성의 6분의 1이 엉덩이 골절을 경험하는데, 이것이 악화일로로 이어져서 죽음에 이르는 경우도 잦다. 골절당한 사람 중 절반은 다시는 도움 없이 혼자 걷지 못한다. 반면에 아버지는 95세까지도 1.5킬로미터를 걸어서 도서관에 다녔다. 올 때 갈 때 모두 책을 들고서.
-... 아버지의 연장은 90세에 끝내 은퇴했다.
표시하고 보니, 작가의 아버지는
90까지 사랑(섹스?)을 했고, 평생 운동과 책을 놓지 않은 사람이다.
아들이 이렇게 멋진 전기문을 써드릴 만한 노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