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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잎 Sep 02. 2022

날카로운 첫 음주의 기억

- 세상의 모든 10대들처럼 

10대들의 음주가 광란이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몰래 마셔야 한다. 

빨리 마셔야 한다. 


'몰래'와 '빨리'가 만나 달릴 경우 다음 정류장은 '과음'이다.

종점은 당연하게도 '광란'이다.

 

광란의 단계에 이르면 '몰래'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누군가에게 어떤 식으로든 들키게 되어 있다. 

이미 인사불성이 된 아이들은 뒷일에 신경 쓸 '정신머리'라는 것이 없다.


1986년 여름에도 그랬다. 


J는 마음이 급했다. 

곧 다가올 수학여행에서 어설픈 아마추어일 수는 없었다.


"나, 술은 처음이야. 어머 너무 무서워!"


이건 아니다. 


J는 여유로운 프로가 되고 싶었다.

완전 초짜들에게는 자신감 있게 한 잔 권하고,

처음 마시는 술을 조절하지 못해 심하게 취한 친구들에겐 등도 두드려주고,

과하게 주정을 하는 친구는 잘 다독여서 재우는

자타공인 프로의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량을 먼저 측정해놔야 하는 법.


J는 기회를 엿보며 주변 아이들을 타진해봤다.

마침 집이 비는 아이가 있었다. 

같이 마실 친구 몇 명을 섭외하여, 야자를 째고 모였다. 

술은 종류 불문 가격 불문 각자 최선을 다해 조달하기로 했다. 


아마 6시경 다 모인 것 같았다.

아이들이 가방에서, 주머니에서 꺼낸 술은 실로 다종 다양하였다. 

소주, 맥주, 청주, 포도주 등. 


이 은밀하고도 비장한 술 파티(혹은 술 전쟁)의 파장 예정 시간은 야자가 끝나는 10시.

안주는 없었다. 술 사느라 안주까지 살 돈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냥 그 친구 집에 있던 라면과 급조된 과자 몇 조각. 


그 와중에 누군가가 어디서 주워들은 말을 했다.


술은 도수를 점점 높이면서 먹는 거라고. 그래야 덜 취한다고.


귀가 시간 전에 취해야 하고 깨기까지 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친 J는 

일단 빨리 취해서 주량을 알아봐야겠다고 판단했다.

이에 J의 긴급 제안.


"야, 우리 빨리 취해야 빨리 깨지 않겠니?

그러니까 센 술부터 먼저 먹어서 취하고 나서, 약한 술을 더 먹을지 말지 결정하자."


"아! 그래, 그러자."


J의 깊은 뜻을 눈치챈 한 친구의 동의로 우리는 소주를 제일 먼저 깠다. 

모인 술 중 소주가 제일 많기도 했다. 


네댓 명이 몇 병을 마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학생들이고 처음이라 그리 많이 마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모두들 나가떨어지고 남은 술은 맥주 두어 병과 포도주 1병.


토하고, 울고, 노래하고, 자고.

광란이었으나 그리 심한 광란은 아니었다. 

18세 여학생답게 예쁜 광란을 각자 피웠다.  

그리고 가출해버린 정신머리로 인해 

이후 각자의 집에서 각자의 몫을 치렀다. 


문제는 J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열심히 마셨지만 취하는 느낌이 없었다. 

옆에서 헤롱 거리는 애들을 본 J는, 

기껏 준비한 술 연습이 실패할까 봐 불안하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했다.


J는 포도주를 열었다.

그때의 포도주는 지금의 와인이 아니다. 

동네 슈퍼에서 파는 이상한 포도주였다. 

마주앙이라는 근사한 이름의 대중적인 와인도 물론 아니었다. 

거무스레한 병에 든 술이었다. 

동네 골목 구멍가게에서도 팔았던 희한한 포도주였다. 


그 한 병을 J 혼자 다 마셨다. 

그럼에도 별로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긴장해서 취기를 못 느꼈던 것 같다. 

J는 정신이 육체를 상당히 잘 지배하는 유형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결국 J는 자신의 주량이 보통 이상은 된다는 것을 확인한 데에 의의를 두고 집으로 갔다. 

10시 반쯤 도착했고. 다행히도 대문은 당시 중3이었던 남동생이 열어줬다. 

취했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남동생이 J를 보자마자 기겁하는 표정은 알아볼 수 있었다. 

입단속을 시키고 방에 들어갔는데, 그 순간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자기 몫의 광란이 시작된 것이다. 

화장실로 직행하여 토님을 연속 발사했다. 

입으로 쏟아지던 빨간색으로 범벅된 액체를 J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 색깔, 냄새, 느낌.......우웩!!!!!!!!!


소주까지는 주량이 무한정이었으나

마지막에 마신 포도주는 쥐약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망의 수학여행에서 J는 본인이 그려왔던 프로의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다. 

술이 세기도 했고 연습 덕이기도 했다. 

술이 취해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었기에

여유롭게 친구들 등도 두드리고 화장실 동행도 해주고 술잔을 채워주기도 했다. 

 

술을 마신 수십 명(수백 명?)의 여고생들은 그야말로 광란의 밤을 보냈다.

선생님들도 예상하고 미리 피신을 했는지,

숙소의 출입문은 밖에서 굳게 잠겨 있었고, 

아무도 그들을 제어하지 않았다. 

이날의 광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상세하게 소개하기로 하자. 

J는 그 모든 광란의 현장을 여유롭게 감상하며 즐긴 1인이었다. 


아.

고등학생들이 술을 마셨다고? 

라는 새삼스런 질문은 하지 마시라. 


대학에 간 J는 알게 된다. 

자신의 주량이 거의 무한대라는 것을.

그로 인해 괴물이라는 별명을 얻어 걸치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무한대가 유한대로, 두 자리에서 한 자리로 팍팍 줄어들고 있음에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여 치르게 된 수많은 사건사고들은 

J의 인생에 수많은 추억과 무늬, 얼룩과 치욕을 새겨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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