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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색 선글라스 Jun 30. 2023

우리는 더 이상 ‘팝 아트’를 그려내지 않는다.

스스로 새로운 간판을 만들기 위해

  미술은 시각문화의 일환이다. 작가는 시각적인 모티브를 바탕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관람객은 주어진 시각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작품을 해독해 나간다. 미술작품은 마치 하 나의 퍼즐게임처럼 주어진 여러 가지 정보를 조합해서 관람객의 해독을 이끌어내는 작업이라 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시각문화의 일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각문화의 일환이기에 대부분의 정보는 시각으로 제공된다. 물론 영상작업의 경우에는 청 각적인 정보가 제공되고 사운드스케이프를 활용한 작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작품의 경우에는 직접 만지는 촉각적인 정보가 제공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정보는 시 각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시각정보를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작품의 정보를 제공한다. 그렇기에 시대에 따라서 정보의 제공 방식은 변화한다. 중세와 르네상스 유럽은 기독교적인 이미지를 활용하여 관람객들에게 정보를 제공했으며, 같은 시대의 동아시아는 불교적인 모티브를 통해서 정보를 제공했다. 18 세기 일본 우키요에의 경우에도 토속신앙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그려졌으며 미래주의 작가 들은 속도감이라는 방식을 통해 역동적인 메시지를 제공했다. 이처럼 작가들은 시대에 알맞은 모티브들을 사용했으며 모든 이는 아니었지만 주류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2022년 현제를 살아가는 시점에서 동시대의 시각언어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동시대의 시각문화 모티브를 알아보기는 너무나 힘들다. 세계화가 이뤄진 현대이기에 더 그렇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전 세계의 시각문화를 접하고, 예술작품을 접 한다. 너무나 많은 문화권에서 날아온 작품은 미술관에서 혼합된다.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제 작된 작품은 저마다 다른 해독서를 들고 읽어야 하며 해독서의 범람은 해독의 일관성이 없어진 것처럼 읽히게 만든다. 마치 법칙이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근래 개인적으로 느끼는 부분이 존재한다. 바로 ‘아직 집단이 공유하는 시각적인 모 티브가 살아있다.’는 지점이다. 내가 해당 지점을 느끼는 집단이 바로 한국의 20-30대 작가들 의 작업이다. 많은 전시공간에서 제작되는 20-30대 작가들의 작업 가운데 많은 작업들이 만 화와 게임이라는 문화에 기반을 두고 제작된다. 주변에서 나타나는 친숙한 이미지를 사용하며, 흔히 이야기하는 ‘팝’한 색채와 이미지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너무나도 진부하 다.


나는 이런 만화와 게임을 베이스로 제작되는 작품들에 대해서 ‘팝아트’라는 단어를 붙이고 싶지 않다. 바로 이미지를 사용하는 바탕의 변화가 존재한다는 이유다. 20-30대 작가들이 사 용하는 이미지들의 다수는 1990-2000년대에 상연되었던 작품들이 대다수다. 미술이라는 거대 한 담론으로 묶어내면 여전히 동시대에 위치하고 있는 시기이지만 대중문화에서는 다르다. 게 다가 80-90년대생 작가들에게 해당 작품들은 사실상 유년기에 방영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동시대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 동시대의 이미지를 사용한 팝아트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지의 표현방식 역시 다양하게 나타난다.


만화적인 이미지의 사용은 구상회화나 구상 조각에서만 사용되지 않는다. 박혜영 작가의 경 우 폴리곤의 형태를 지닌 추상회화를 그려냈는데 이는 게임이라는 시각적인 언어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그 밖에도 여러 8090 작가들이 만화나 게임을 바탕으로 추상회화를 제작한다. 이 제 더 이상 만화라는 주제에 대해 구상적인 이미지로 해석하는 시기를 넘어섰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인가. 나는 유년기의 문화가 결정적이었다고 생각된다. 8090년대 생이 10대 시절을 보내던 당시는 아직 TV를 통한 문화가 보급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당시 TV에서는 ‘투니버스’와 ‘온게임넷’을 대표로 한 게임과 만화를 상영하는 채널이 여럿 존재했다. 8090년대 생 작가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화와 게임이라는 문화를 접하게 되었고 그 흐름이 이어져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베이스로 작동하게 되었다. 마치 민주화의 불길이 휘몰아치던 7080년대에 대학생활을 보낸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메 시지를 작품에 투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8090년대 생 작가들의 작업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작업은 더 이상 ‘팝아트’가 아니다.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과는 다른 방식을 차용하고 있는 작가들을 같은 양식으로 우리는 묶어내면 안 된다. 그렇다고 그들을 단 순히 디지털 세대의 작업이라고 규정하는 행위는 더욱 안 된다. 마치 20년이 넘는 시간의 차 이를 MZ라는 단어로 묶어버리는 것과 같은 편의주의라고 생각한다. 작가들이 만화나 게임을 사용하는 것은 기술에 대한 동경이나 대중적인 이미지의 사용이 아니다. 오히려 8090년대 작 가들이 사용하는 만화나 게임의 경우 마이너한 이미지인 경우다 다수이다. 그들에게 해당이 미 지는 본인이 가장 익숙한 이미지이며 마치 중세의 화가들이 기독교적인 모티브를 사용했던 것 과 같은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새로이 내리는 정의는 큰 반발을 맞이할 수 있다. 작가들에게는 본인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행위일 수 있으며 기성 평단에게는 ‘팝아트’와 별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작품을 굳이 분리할 필요가 있냐는 비판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새로이 정의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각언어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는 시기를 더 잘 알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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