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산책을 했다. 저녁이 되니 더위도 야간 누그러졌고 살살 바람도 불었다. 한두 번 지나다니던 길이 아니었는데 못 보던 술집을 발견했다. 고개만 돌려 술집을 보며 걷다가 결국 돌아서서 술집 앞에 멈췄다. 유리문 앞에 걸려 있는 혼술이라는 두 글자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혼술이라니 발음도 글씨도 낭만이 뚝뚝 떨어졌다. 혼자 술을 마신다고 하면 알코올중독자가 떠오를만한데 혼술이라고 하니 영혼이라도 부르는 신선주 같았다. 술이 아닌 고독이나 여유를 마시는 느낌 아닌가. 산책을 하며 몇십 번을 오고 가던 길인데 어째서 이제야 알아봤을까. 앞만 보고 다니기도 했고, 후미진 상가에 이렇게 재미난 술집이 있을지 생각을 못 했다.
가게 안에는 손님은 한 명도 없었고,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그 텅 빈 공간을 보다 좀 용기 생겨 문을 열었다. 혼자서 술집을 간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 많이 긴장됐다. 술집 주인이 남자라면 그냥 나와야겠다는 생각도 하며 주방 안에 있는 사람이 알아차리라고 소리를 냈다. 다행히 나와 같은 연배의 오십 대 여
하지만 어색한 건 어쩔 수 없어 두리번거리며 벽에 붙은 메뉴를 살폈다. 뭘 먹어야 하나? 술을 거의 마시지 않고 살아서, 뭘 마실지 선택하기도 힘들었다. 그때 그림이 그려진 메뉴가 보였다. 하이볼. 술도 못 마시지만, 소주나 맥주보다 양주를 좋아하던 과거를 생각해 기대하고 하이볼을 시켰다. 하지만 혼술이라고 가볍게 한잔하고 가려했는데, 안주는 좀 무거운 참치회가 주메뉴였다. 간단히 먹기에는 가격에 제법 비쌌다. 저녁도 먹었는데 혼자 먹자고 그 비싼 회를 시킬 수는 없었다. 메뉴를 둘러보며 저녁 먹고 산책하다 들른 사연을 말하며 난감해하니, 사장님은 고맙게도 가벼운 안주를 만들어 주셨다.
하이볼의 맛은 시원하고 쌉싸름하고 향긋했다. 안주로 나온 샐러드도 산뜻하고 신선했다. 이게 여름의 맛이구나 감탄이 절로 나왔다. 딸기잼을 만들려고 몇 박스 사뒀다는 딸기도 한 접시 주셨는데 새콤달콤 맛있어. 손님이 나 혼자라 사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일식집에서 오래 일하다 가게를 냈다는 이야기와 음식이 소문이 나서 배달 손님이 많다는 이야기.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지 않은 나는 일식 자격증을 갖고 가게를 성공적으로 꾸려나가는 사장님의 모습이 멋지기만 했다.
몇 마디를 더 나누고 사장님은 남은 일을 하고 나는 혼술의 시간을 즐겼다. 얼음이 녹을수록 쌉싸름한 술맛은 옅어졌고, 술이 오른 나는 기분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기분이 좋아 다음에는 참치회를 먹으러 오겠다며 인사를 했다. 술도 약하고 참치회가 비싸다고 결론 내린 사람이 무슨 다음을 기약하나. 하이볼 한 잔에 취한 거다. 혼자 산책하다가 즉흥적으로 술을 한 잔 했다는 그 자유로움에 취해 흥이 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