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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hee Oct 24. 2024

마치 아닌 것처럼


                                                                          

  남은 것은, 아내가 있는 사람도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 있으십시오. 이 세상의 모습은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전서 7장 29, 30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사로잡혔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인에게 보낸 이 서한을 접한 나는 계시를 받은 신도였다. ‘아닌 것처럼’의 신도.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아이들을 키울 때의 힘듦은 차라리 다 키운 후에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의 고민보다는 가벼운 것이었다. 백세 시대에 오십이 지난 시점에서 보니 지나온 시간은 너무 숨 가빴고, 남겨진 시간은 아득하기만 했다. 다시 오십 년을 더 산다는 것이 지루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어떻게 이 긴 시간을 살아내야만 할 것인가.

  빈둥지 증후군은 아이들이 집을 떠나 집에 홀로 남겨진 중년 여성의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둥지는 욕망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오십에 접어들며 깨달았다. 욕망이 비워졌고 아무런 욕망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끝없이 살아야 한다. 그 현실 앞에서 공포에 휩싸였다. 오십 년의 삶 후 나는 마치 유령처럼 흩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주체로서의 고군분투는 끝났다. 미술관에 가거나 강연을 찾아다니는 문화인이 되거나 성인 자녀들의 삶을 위한 보조자가 되거나의 삶이 남겨졌다. 어느 것도 받아들이기에 만족스러운 미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전의 삶이 좋았다거나, 다시 그런 삶을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욕망이 있던 순간이 견딜만하긴 했지만 이제 내 꿈의 목표가 정신없이 쫓아다니던 허깨비였음을 알게 되었다.

  돌려받을 것도 없는데 뭔가 채권자가 된 것 같았다. 가족을 위해서만 살았다고 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라 자백하는 꼴임을 안다. 하지만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달리 무엇이라 내세울 게 없는 삶이라 억울한 기분만 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적인 행복. 얻을 수 없는 것을 몇십 년에 걸쳐 이루려 애썼다. 하지만 결국 나만 행복하지 않다면 가능한 것이 행복한 가족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행복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것은 약점이 되기도 하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차려놓은 아침밥을 쓱 한번 쳐다보고 지나치는 남편, 더러운 방을 치웠다고 화를 내던 딸, 이정도는 엄마라면 아내라면 당연히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던 많은 요구. 그 속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 크게 소리 한번 치지도 못했던 나약한 내 모습. 그렇게 아슬아슬 다툼없이 사는 가족을 혼자서 열심히 흉내 내며 지켜왔다.

  남편은 기분이 나쁠 때면 나를 ‘어이’라는 부른다. 한때는 사랑이라 착각해서 또 한때는 불쌍하다는 동정심으로 남편의 무심함을 이해해 준 결과가 이 모양이다. 남편에게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배신감과 함께 너무나 비참했다. 내가 ‘너’라고만 불러도 파르르 화를 내는 사람이라 그 호칭이 무겁게 다가왔다. 아이들은 사춘기라는 방패 아래서 나를 공격했고 나는 맨몸으로 그 날선 말들을 받아냈다. 네가 하는 말들이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했을 때 큰 아이가 뭐라고 했던가. 아이는 자신에게 ‘엄마 이슈’가 있어 어쩔 수 없다고 차갑게 말했다. 사과를 바라는 말에 더 큰 비수가 날아왔다. 등록한 학원을 가지 않는 작은 아이에게 한마디 했을 때 아이는 파르르 화를 내며 내게 말문을 닫았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했던 내 모든 친밀한 노력은 모두 무시되었다. 나는 행복한 가족이라는 시험에서 낙제한 것 같다. 그나마 가족들만은 자기들이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이제 헛된 꿈을 접고 ‘아닌 것처럼’의 신앙인이 되어 살아 볼 생각을 한다.

  마치 엄마가 아닌 것처럼, 아내가 아닌 것처럼, 여자가 아닌 것처럼, 사람이 아닌 것처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직은 모르겠으니 지금과는 다른 형태를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내가 아닌 것처럼’의 시작은 그래서 내가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인 것도 같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사사건건 걱정하며 도움을 주려고 안달하다가 아이들의 짜증을 받아줘야 한다. 아내라는 이름으로 요청하지 않은 일까지 해주고, 남편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여자라서 착한 사람, 다정한 사람이 되려 무리하게 주변을 살핀다. 사람이라서 모르는 것에 불안하고, 병들고 죽는 문제에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신실한 신도인 나는 이제 아이들만의 세계를 멀찍이서 관조한다. 스스로 할 일을 미리 나서서 해주는 아내 역할을 잊었고, 남편이 없는 사람처럼 집을 수리하고 기계를 고친다. 여자라서 더 공격받는 자기 보살핌도 이제 당연시하려 한다. 깨끗한 집안보다 내 무릎과 손목이 더 소중하다. 좋은 것 예쁜 것을 나도 욕심낸다. 그리고 사람이 아닌 것처럼 모호한 문제들을 그대로 남겨둔다. 죽음이 무엇인지? 어떤 삶이 의미가 있는지? 알게 뭔가. 마치 식물이나 동물처럼 적응하고 반응할 뿐 걱정은 하지 않는다.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한다. 내성적이지 않은 척 사람들에게 연락을 먼저 해서 모임을 만든다. 어쩌다 참석한 모임에서는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젊은 사람들만 듣는 강의를 신청하고 기특한 중년 여성이 되기도 한다. 소심해서 못했던 명절 선물도 건물관리인에게 건네본다. 겁이 없는 것처럼 혼자 낯선 나라를 여행하고, 아무에게나 말을 건다. 나라고 생각하는 나였다면 하지 않을 일들을 찾아서 해본다.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모임은 재밌었고 작은 선물은 고마운 마음을 잘 전해줬고 낯선 곳은 아는 곳이 되었다.

  내가 아닌 것처럼 살수록 점점 이게 바로 나처럼 사는 거라 생각된다. 나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 항상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 밖에서 모양도 이름도 없이 떠돈다. 목적 없이 다음 또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를 찾았다.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은 내 상상력을 넘어서는 곳에 도달하는 즐거움을 약속한다. 이제 오십 년 더 아무런 목적 없이 사는 방법을 알았다.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니 시간이 너무나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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