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다. 나를 닮아 부지런한 아이는 가망이 없는 일에 열심이다. 그래서 자신의 성적으로는 합격하기 힘든 대학에 수시 원서를 모두 넣었다. 나를 닮아 꿈도 야무져서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래도 해본다며 한편으로는 합격을 믿는다. 엄마와 딸이 똑같이 무모해서 담임선생님이 오히려 편하다고 하신다. 합격할 대학을 찾아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남긴다. 아이는 혹시 합격할만한 대학에 덜컥 붙어 가고 싶지 않은 대학을 다녀야만 할까 봐 차라리 아무 걱정이 없다.
아이가 합격하면 내 오랜 신념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나는 늘 ‘우리 아이는 운이 좋아.’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낙관의 말을 늘어놓는다. 만약 불합격해도 더 멋진 삶을 위한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것도 운이 좋은 거라 말한다. 그래도 역시 아이가 합격하지 못할까 약간은 걱정이다. 오직 철학과 사학만을 하고 싶다는 아이가 그 공부를 포기할까 불안하다. 아이의 유일한 진심인 학문을 하며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합격이 거의 기적 같은 일이라 아이가 합격하면 수건에 합격 문구를 넣어 기념할 생각이다. 요즘은 그 문구를 무엇으로 할까 궁리하는 게 낙이다. “오 멋진 대학합격‘ ’대학합격 만만세‘ ’신난다! 합격‘ 무엇이 좋을까. 아직 마음에 드는 문구를 찾지는 못했다. 어느새 아이의 합격보다 수건 제작에 더 진심이 되어, 아이의 불합격 자체보다 수건 제작을 하지 못할까 더 걱정하고 앉았다.
이런 생각까지 하는 나를 보며, 왜 이렇게 기념 수건에 집착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생각할수록 기념 수건보다 기념 수건을 만들었다는 이벤트를 갖고 싶은 것 같았다. 수건을 만들어 자매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하나씩 주고, 그냥 옆집 아랫집에도 다 돌리고 싶은데 왜 그러고 싶지. 자랑하고 싶고 축하받고 싶은 거라면 그냥 말로 해도 충분할 텐데 왜 수건을 줘야 하지. 이런 질문 후 내린 나름 내린 결론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소망이라는 거였다. 대학합격 기념 수건을 돌리는 걸 상상하면 너무나 재밌었다. 내가 원하는 건 대학에 합격한 딸을 위해 수건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글쓰기 동아리에서 쓴 글을 잡지에 투고하라는 말을 듣고 실행한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잡지에 내 글이 실린다는 것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았다. 원고료도 주지 않고 그렇게 명예롭지도 않은 잡지에 내 글이 실리는 게 뭐 그리 즐거운 일이었을까. 하지만 그런 이벤트로 동아리에서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 기대할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채택이 되지 않았다는 문자를 받고 내가 느낀 실망은 아무런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뿐 다른 아쉬움은 없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재밌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순간을 즐길 수 없다면 소원이 이뤄진들 어떤 만족이 있을까. 소원을 이루고 싶은 건 그 소원성취에 대해 끝없이 수다를 떨고 싶은 게 다가 아닐까. 그런 의미로 로또 당첨된 사람들이 당첨금을 지키기 위해 ’자랑하기‘를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자랑하며 얻을 수 있는 쾌락을 보상받기 위해 이상한 곳에 돈을 펑펑 쓰다 재산을 탕진하게 되는 걸까. 말할 수 없는 행운은 오히려 불행으로 변할 수 있다.
이야기하고 싶어 소망을 이루고 싶었나 보다. 이야기하며 하하 웃고 떠들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야기만이 재미를 준다고 믿는다. 합격보다 더 바라는 건, 합격의 기쁨을 말하고 또 말하는 것. 그리고 합격의 기쁨을 기념 수건까지 만들어 축하하는 재미를 또다시 이야기에 덧붙이는 것. 웃고 떠들기 위해 재밌는 일이 생기길 바란다. 나는 마침내 불합격에도 응원 수건을 만들면 안 될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대학 입시라는 무거운 근심은 내려놓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도한다. 이번 입시에 성공하지 못해도 나는 응원 수건을 만들 생각이다. “응원! 재도전!!” “한 번 더!” “곧 합격!” 이제 나는 불합격에 쓸 문구를 찾으며 시간을 보낸다. 만약 합격을 못 하더라도 불합격을 재밌게 겪어보자. 아이에게 속살거린다. “제때 대학을 가는 것이 대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