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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붕 Sep 13. 2021

하이난 4박 5일 자전거 일주

노동절, 하이난 섬으로

코로나는 우리의 삶을 덮쳤지만 연휴는 어김없이 다시 돌아왔다. 5월 1일 노동절, 5일짜리 연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중국에서도 3대 연휴 기간(춘절, 노동절, 국경절)은 여행 성수기임과 동시에 최악의 여행 시즌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서 한 번쯤은 봤을 ‘만리장성에서 내 의지와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떠밀려서 걷는 영상’이라든가 ‘상하이 무장경찰의 인간 신호등 영상’이 모두 이 기간에 찍힌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외국인)가 알만한 곳을 간다면 말 그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 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마음의 각오를 ‘단디’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전 같았으면 몰려드는 인파를 피해 근처 동남아로 떠났겠지만 코로나 이후로는 나갈 수도 없는 노릇. 유명 여행지를 가자니 다른 사람 뒤통수만 보고 오거나 길에서 시간을 허비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고, 집콕을 하기엔 연휴가 아까웠다. 그래서 여기저기 여행사 플랫폼을 뒤지다 눈에 쏙 들어오는 게 있었으니 바로 ‘하이난 자전거 일주’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유명한 중국 남단의 하이난 섬은 겨울 휴양지로 인기가 많기 때문에, 비교적 비수기인 여름+더운 날씨에 자전거를 타러 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여행 겸 운동도 하자는 세 가지 이유로 선택하였다.


평소 자유 여행을 선호하지만 부득이하게 여행사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 같은 경우가 그렇다. 자전거 대여, 길 찾기, 숙소 같은 부분에서 신경을 덜 수 있고, 혼자보단 여러 명이 함께 타는 것이  보다 안전할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이번에 내가 참가한 프로그램은 총 4박 5일, 하이난 섬 북쪽의 ‘하이코우海口‘에서 출발하여 남쪽의 ‘싼야三亚’까지 동쪽 길을 달리는 코스다. 하이난 섬에는 크게 세 가지 루트의 자전거 코스가 있는데 풍경이 아름다운 동쪽 길이 가장 인기가 많고 대중적이다.

이번에 우리가 달렸던 하이난 동쪽 자전거 코스

집합 장소는 하이난 하이코우海口의 한 자전거 대여점. 자전거와 장비를 선택하고 시운전 후 이상 없으면 대여한 자전거를 타고 숙소까지 돌아가서 다 함께 저녁을 먹고 푹 쉬는 것이 이 날의 일정이다.

수많은 동호회 깃발이 걸려있던 자전거 대여점 517骑行驿站。그리고 가이드가 나눠준 이번 우리 팀의 마스코트, 도라에몽.
본격적으로 라이딩 시작. 든든하게 아침 먹고 단체 사진 찍은 뒤 출발!

다음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는 일정이 시작되는데, 4일 동안 하루에 대략 70-100km 정도를 달린다. 라이딩 경험이라곤 어릴 때 중고등학교를 자전거로 등하교했던 것과 중국에서 공유 자전거만 타봤던 게 전부였던지라 하루에 저만큼 타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었는데, 약간의 엉덩이와 손목 통증만 있었을 뿐 생각보다 몸이 많이 힘들진 않았다. 특히 타고난 하체를 자랑하는 나의 신체적 특징 덕분인지 아무런 통증 없는 다리를 보며 삼십여 년 인생 중 처음으로 다리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코코넛과 야자나무숲

누군가 하이난에서 자전거를 타면서 가장 좋았던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대답은 단연코 '코코넛'과 '야자나무숲'이다. 하이난은 중국 내 주요 코코넛 생산지답게 곳곳에서 코코넛을 판다. 어마어마한 더위 속에서 달리다가 마시는 코코넛은 그 어떤 음료도 가뿐히 능가한다. 코코넛 즙으로 온몸의 갈증을 달래고, 안 쪽의 젤리 같은 과육까지 긁어먹으면 속도 든든하다.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니 (1개당 6-7위안(1300원) 정도) 안 사 먹을 이유가 없다. 모두들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달리다가 코코넛 파는 곳만 보이면 얼마냐고 가격을 물어보며 하루에 한 개씩 열심히 사 먹곤 했다.

1일 1코코넛. 더울 땐 이만한 게 없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작은 동네의 야자나무가 우거진 뒷길 구석구석을 달렸다. 보통 하이난에 오는 관광객들은 각종 리조트와 호텔이 모여있는 '싼야三亚'에서 곧장 숙소로 가기 때문에 이런 길을 지나갈 필요도 없으며,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물론 고급 호텔에서 호화로운 휴식을 보내는 것도 좋지만 숨겨진 작은 골목길과 현지 주민들이 사는 마을을 달리며 아직 개발되지 않은 하이난의 본래 모습을 느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자전거를 타야만 볼 수 있는, 땀 흘리며 달려왔기에 더욱 값진 광경들이다.


야자나무숲을 벗어나면 넓게 펼쳐진 바다를 만나는 것도 '하이난'이기에 가능하다. 잠시 자전거에서 내려 각종 포즈를 잡고 서로 인증샷을 찍어주며 추억을 남기다 보면 어느새 첫날의 어색함은 사라지고 든든한 동료들이 옆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자전거 타면서 만난 야자나무 숲과 하이난의 바다. 자전거 타면 누구나 다 해본다는 '한 손으로 자전거 들기' 인증샷도 남겨본다.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도 있고

4일 동안 달리면서 세네 번 정도 높은 오르막길을 만났다. 가이드가 미리 경고할 정도로 경사가 상당히 높았는데, 어찌나 경고를 제대로 해주었던지 오르막길을 만나기도 전에 지레 겁먹을 정도였다.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다. 힘들지만 그래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 올라가는 것과, 자전거에서 내려서 끌고 걸어 올라가는 것. 이왕 타는 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중간에 내리지 말고 자전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 보겠노라고 마음을 먹고 힘차게 페달을 밟아 오르기 시작했다.

등산도 마찬가지지만, 자전거는 더욱 우리네 삶의 모습을 쏙 빼다 닮았다. 평평한 길은 달리기엔 쉽지만 계속 평평한 길이 이어지면 금세 재미없고 무료해진다. 간혹 내 의지와 관계없이 멋진 광경이 나타나면 가끔 눈은 호강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적 요인일 뿐, 내적 성취감이나 재미를 느끼긴 힘들다. 그래서 자전거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적당히 있어야 재미있다.


힘든 오르막길을 이겨내야만 느낄 수 있는 내리막길의 쾌감. 특히 오르막길에서 당장이라도 자전거에서 내리고 싶은 유혹을 꾹 참고 이겨내면 내리막에서의 쾌감은 배가 된다. 그렇게 내려오면 다시 또 크고 작은 여러 오르막길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 일행 중 대만에서 온 남자분이 있었는데 나이가 조금 많아 모두들 '따거大哥'(dage/맏형, 큰형)라고 불렀다. 일 년에 한 번씩 자전거를 타고 중국이나 대만을 일주한다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자연스레 그의 인생 이야기가 나왔다. 대만에서 사업이 잘 돼서 꽤 큰돈을 만지며 성공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그 돈을 모두 잃고 말았다고 했다. 그 뒤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는 그는 자전거가 인생과 닮아서 좋다고 했다. 지금은 그의 인생에서 내리막 일지 몰라도 다시 올라갈 거라는 그의 마음과 의지가 자전거 라이딩과 꼭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더위와 찢어진 레깅스

함께 탔던 일행들은 신체적 통증을 어려움으로 꼽았지만, 나에게 의외의 복병은 날씨였다. 35도를 넘나드는 더위에서 장시간 운동을 해 본 적 없었던 나로선 가장 큰 약점이 더위였던 것이다. 그늘 하나 없는 땡볕을 달릴 때면 왜 사람이 일사병으로 죽을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특히 마지막 날, 싼야三亚에 가까워질수록 길은 점점 넓어지고 길가의 나무와 그늘은 점점 줄어들었다. 더위와 싸우며 체력이 점점 바닥으로 치닫고 있었던 나는 쉴 때마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본격적인 시내 진입을 앞두고 겨우 찾은 좁은 그늘 아래에서 마지막 휴식을 가졌다. 가이드는 앞으로 쉬지 말고 종점까지 힘내서 가자고 했다. 계속되던 땡볕에 지친 나는 나무 기둥을 찾아 잠시 기대앉아 쉬려고 했다. 그때, 사건이 터졌다.


찌익-

거친 소리와 함께 레깅스가 찢어졌다. 알고 보니 내가 기대어 앉으려 했던 나무 기둥엔 뾰족한 가시가 한가득이었는데, 보지도 않고 덥석 주저앉다가 레깅스 엉덩이 부분이 나무 가시에 걸려 찢어지고 만 것이다. 살짝 찢어진 부분은 레깅스의 탄력 덕분에 손바닥만큼 구멍이 커졌고, 나는 급히 엉덩이 부분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만약 그날 레깅스 안에 자전거 라이딩용 속바지를 입지 않았더라면 인생에서 두 번 없을 쪽팔림의 역사를 기록할 뻔했다.


가뜩이나 더워서 바닥난 체력에 옷까지 찢어지고 나니 쪽팔림이고 뭐고 울고만 싶었지만 우는 것조차 그 상황에서는 사치였다. 더 이상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빨리 바지를 갈아입고, 녹아서 눅눅해진 초코바를 일부러 꺼내어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목이 콱 막혀왔지만 이거라도 먹지 않으면 못 달릴 것 같았다.


'너희들 먼저 가, 나는 천천히 갈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나를 두고 먼저 가지 않을 것을 알기에 대신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했다.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난 뒤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대만에서 온 '따거大哥‘는 내가 많이 지쳤다는 것을 알곤 일부러 내 뒤에서 천천히 달려주었다. 그렇게 마지막 지점을 앞두고 우린 서로의 속도에 맞춰 함께 달렸고, 함께 도착했다.

감동적인 도착의 순간.


첫째 날 99km,  둘째 날 63km, 셋째 날 103km, 마지막 날 105km, 총 370km의 대장정이 드디어 끝났다. 마지막 날 일행들의 도움과 응원이 없었더라면 아마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싼야三亚를 떠나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그룹 위챗 방에 다시 한번 고마움의 메시지를 남겼다.

완주 증서와 기념 메달.


하이난에서 보낸 내 인생 첫 4박 5일 자전거 여행은 길에서 흘린 땀방울만큼이나 많은 것을 얻게 된 또 하나의 소중한 경험으로 자리잡았다.


지금의 나는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을까, 내리막길로 내려가고 있을까. 설령 내리막길이라 하더라도 예전처럼 두렵진 않다. 내리막길에서 내려오면 그 앞엔 당연히 오르막길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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