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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빈 Your Celine Nov 19. 2023

성인이 학원을 다니는 기분은

주기적 설렘 주입기

작사학원 두 번째 수업. 지난주보다는 제법 익숙해진 발걸음으로 강의실을 들어섰다. 맨 뒷자리 의자를 뒤로 빼었다. 가방을 올려놓았다가 숨을 한번 쉬고 다시 들어 올렸다. 선생님의 옆자리로 가방을 옮겼다. 나에게는 이 두어 시간이 너무도 소중했고, 그 애정을 태도로 보상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움직임은 모두가 멀찍이 앉을 때 선생님의 옆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작사학원의 강의실은 이전에 숱하게 드나들었던 아나운서 학원 강의실과 굉장히 유사했다. 일반적인 학원 강의실은 칠판 앞에 선생님의 자리가 있고, 그를 마주 보는 학생들의 좌석이 1개씩 떨어져서 배치되어 있는 꼴이다. 하지만 이곳은 'ㄷ'자 형태로 긴 책상이 이어져있다. 짧은 허리 부분이 선생님의 자리다. 학생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는다. 서로의 모습을 보아야 하며 대화가 중요한 수업에서는 최적의 구조이다. 


나는 갓 시작한 병아리 초급반이다. 초급반에서는 주로 작사에 대한 이론을 배운다. 나름 꾸준히 글을 써오고, 시간이 지나 보니 책도 출간한 작가가 되었지만. 작사에 대해 약 4시간 정도 배운 사람으로서 느낀 바. 작사는 그동안 내가 써왔던 글쓰기가 아니었다. 마치 글을 디자인하는 화가처럼 느껴졌다. 글쓰기는 캔버스가 없는 넓은 공간에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이라면, 작사는 정해진 크기의 캔버스 혹은 선이 분명한 드로잉북 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깔을 채워 넣는 작업 같았다. 숙련된 작사가는 똑같은 드로잉북 위에 그라데이션을 넣고 점묘법을 활용할 줄 아는 것이다. 표현의 범위는 정해져 있으니, 그 안에서 깊이를 다투는 것이었다. 글쓰기로 생각의 매듭을 푸는 과정에서 종종 희열을 느끼는 나에게 작사는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글이라는 날카로운 도구로 음악 안에 숨어있는 가장 세밀한 것들을 조각하는 작업인 듯했다. 그러니까, 글의 주체가 내가 아닌 것이다. 조각가 혹은 탐정이었다. 선생님은 여러 번 강조해서 말했다. 작사를 할 때 가장 필요한 태도는 나의 취향이 아닌 대중의 취향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더 정확히는 '곡의 느낌'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때로는 눈동자 앞에 거울을 둔 듯, 내 모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숨 쉬는 삶에서 표현이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가사를 만드는 일은 내가 아닌 타인의 삶에 거울을 비춰야 가능하다. 그러나 타인의 삶에 거울을 비춘다 해도 보는 것은 나의 눈이다. 때문에 가사에는 표절 사고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같은 곡과 느낌을 가졌더라도 표현하는 몸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러 개의 눈과 여러 개의 마음을 갖는 일이 흥미를 나풀나풀 자극한다. 


성인이 되어 학원을 스스로 다니는 기분을 표현하자면. 새로운 세계로 연결되는 뿌연 설렘이다. 수업시간 순간순간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모두 여성이었으며,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 정도의 분포였다. 선생님이 글자수를 잘못 세는 작은 실수를 했는데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옆자리에 있던 나는 손을 들고 혹시 잘못된 것이 아닌지 물었다. 선생님은 '어이쿠 제가 실수했네요'라고 하며 정정했다. 학생들 중 몇몇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의 민망함을 지켜주고 싶어서인지 일부러 말하지 않은 듯했다. 이러한 성향은 비슷해 보였지만 성격과 생김새는 모두 달랐다. 각자의 생계의 모양이 달랐고, 이곳에 모인 연유도 달랐다. 한 가지 같은 것은 시작하는 마음이었다. 성인이 되어서 스스로 학원비를 지불하고 학생이 되길 자처하는 기분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배움은 곧 새로운 세계로의 연결이자 용기이다. 주기적인 설렘을 주입하는 것은 삶의 깊은 활력소가 된다. 일주일 중 하루를 기다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그간 매일이 설레는 삶이라 자부했는데, 그중 유독 기다려지는 순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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