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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젓한 사람들의 공통점

by 윤수빈 Your Celine

불완전한 청춘이 미울 때마다 김지수 기자님의 문장들로 착실하게 이어갈 수 있었다. 아직 그녀의 이전 책들도 충분히 곱씹지 않았는데 감격스럽게도 신간이 나왔다. 좋아하는 책방에서 북토크라니, 덕질하는 10대 소녀의 마음으로 냉큼 신청했다. 마음 놓고 동경하는 김지수 기자님의 <의젓한 사람들> 북토크에서 길어온 생각들이다.


01 조급함은 역경에 취약하게 만들어요

지갑을 잃어버렸다. 허둥지둥 숨을 고르고 북토크 장소에 도착했다. 일분이 아쉬워 속상했던 마음을 누르고 귀에 들어온 첫 번째 말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탐색, 분투, 멈춤, 전환. 모든 인간은 이 네 가지 생명 진화의 원리에서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노력하면 바로 성취라는 보상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얄팍한 인간의 욕심이다. 그러나 삶은 그리 단순하게 흐르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탐색의 순간, 무언가에 온 힘을 쏟아붓는 분투의 시간, 권태에 잠시 멈출 수밖에 없는 고요의 틈, 그리고 마침내 예상치 못한 전환점에서 방향을 바꾸는 순간까지. 이 네 가지가 마치 파도처럼 번갈아 밀려오고 밀려간다. 나는 그중에서도 ‘멈춤’의 시간을 유난히 두려워했다. 세상이 내 살갗을 할퀴며 빠르게 지나가는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났고, 아무래도 이 시기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 적도 많았다. 끝이 있다면 어서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김지수 기자는 오히려 그 조급함이 우리를 역경에 취약하게 만든다고 했다. 의젓한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억지로 앞당기려 하지 않는다고, 멈춤의 시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엄마가 내게 말했다. '서른 중반 즈음 돼야 좀 무던해지지.' 생명이 기적처럼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성한 성장만이 필요한 게 아니다. 쉼과 물러섬 그리고 방향 전환의 수없는 반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장을 성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02 성실과 몰입을 잘 사용하세요

지난 오랜 시간 동안 성실의 가치는 중요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몰입'의 가치가 함께 대두되는 시대라고 말했다. '성실'이 윤리의 언어라면, '몰입'은 매우 미학적인 것이라고. 지켜야만 하는 의무와 자발적으로 빠져드는 힘 사이에서 많은 이들이 한 번쯤 길을 잃는다. 성실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짓눌리거나, 몰입하고 싶은 것 앞에서 망설이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성실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고 몰입은 삶에 깊고 진한 흔적을 남긴다. 몰입이란 내가 진짜 원하는 것, 나를 나답게 하는 것에 온전히 빠져들어 시간을 무감각하게 하는 경험이니까. 성실과 몰입의 무아지경에 이르른 사람들은 언제나 단단하다.



03 생각보다 행복은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아요

김지수 기자는 우아하고 귀여운 미소로 의젓한 사람들은 행복보다 고통에 대해 더 많이 말한다고 했다. 흔히 ‘행복’을 삶의 궁극적 표상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행복이란 보상이나 쾌락처럼 순간적으로 찾아오고,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진다. 그래서 그녀는 행복보다 기쁨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고 했다. 행복의 존재는 모호해도 기쁨은 확실한 듯하다.



04 완벽함의 반대는 엉망진창이 아니라, “그럭저럭 괜찮음”이에요

대부분의 삶은 어디에도 완벽하지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는다. 대다수의 시간은 그냥 ‘그럭저럭 괜찮은’ 상태로 흐른다. 누군가 말했다. 인생의 8팔은 잊어도 괜찮다고. 아주 반짝이는 2할 정도의 좋은 추억만 잘 품고 살아도 잘 살아가는 힘이 된다고 말이다. 일의 완벽을 좇지만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덜 고통스럽게 완성할 수 있다. 그럭저럭 완성하며 살아가는 날들의 연속이 쌓여, 꽤 괜찮은 인생이 된다.



05 기적은 아름답고 거창하게 오는 게 아니라 툭툭 와요

기적이란 영화 속 장면처럼 막연히 거창하고 특별한 순간에 찾아온다고 기대한다. 하지만 기적의 실체는, 아주 소박하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우리 곁을 스쳐간다. 툭툭. 문득. 그러고 나서 '아 이게 기적이구나'라고 느끼는 사람에게 기적이 오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가장 절망의 순간에 아주 예상치 못한 인물이 무심하게 등장해서 삶을 전환시켰다. 참석자 중 한 분이 질문 시간에 손을 쭉 뻗더니 마이크를 잡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마음으로 모두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라 믿는다. 어김없이 지나간다고. 그리고 툭툭, 기적이 온다고.



06 질문보다 중요한 것은 시선이에요

직접 신청한 첫 북토크였다. 그간 무대 위에서 청중분들을 자주 보았던 터라, 왜 Q&A 시간에 묘한 설렘 기운이 감도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하고 싶은 말들 사이에서 민망함을 이겨내고 손을 번쩍 든 사람과, 입술 안에 감춘 사람으로 나뉠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 질문할 기회를 얻으니, 기분이 상기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았는데, 질문보다 사랑고백이 먼저 튀어나왔다. "저.. 기자님의 인터스텔라로 많은 위로를 얻은 독자 중에 한 명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뵐 수 있어서 너무 좋아요."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이렇게 큰 기쁨이거늘! 이걸 너무 모르고 살았다. 아무튼 나의 궁금증은 그녀의 질문들에 있었다. 기자님의 인터뷰 책에서 인터뷰어의 말들도 울림이 있지만, 세심한 질문들을 낳는 기자님의 생각에 위로를 받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 질문들을 선정하는 기준이 있는지 여쭈었다.


"요즘 AI가 많이 나오면서, 좋은 질문이 좋은 답변을 만든다고 하잖아요. 질문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그런데 저는 질문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사실 보면 제가 던지는 질문들이 생각보다 보편적이에요. 괜찮아 보이는 거죠. (웃음) 그것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다 들어줘요. 경청하는 거죠. 그리고 격려해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도록요. 저는 가장 좋은 질문이 이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요?, 그렇군요!, 그런가요?' 이것보다 좋은 질문이 있을까요?


인터뷰어의 자질 중에 잘 듣고, 잘 말하는 것도 있겠지만 진짜 중요한 게 '잘 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편집이죠. 인터뷰가 끝난 후에, 상대방이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질문 순서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작업이 진짜 중요하거든요. 배치는 상대방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아야 가능해요. 제가 인터뷰하는 사람들은 그 인터뷰에서 모든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이 남겨놓은 작품이나 자료들이 있으니까요. 그걸 바탕으로 가장 극적인 맥락 배치를 하는 게, 나도 모르는 나를 알게 해주는 일이거든요. 상대의 과거 현재 미래를 파악하는 게 동시에 이뤄져야 해요.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게, 저는 질문이 아니라 시선이라고 봐요. 어느 공간에 나를 두고 보느냐에 따라서 포용력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의젓함은 시선의 높이예요. 클레어 키건이라는 작가가 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책이 있어요.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각종 문학상을 휩쓸었는데요. 이 책이 200페이지가 안되는 굉장히 얇은 책이에요. 그런데 이 책의 시선의 높이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요. 그러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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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쩌면 '질문'이라는 글자 위에 서서 질문을 던졌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질문을 다루는 사람이 가져야 하는 힘은 질문력 그 이전에 포용력이었음. 아. 세상을 탐구하듯 오래 산 어른들과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눈 김지수 기자님의 언어들은 폭신하고 날카로웠다. 지나치게 스스로를 높이지도 않지만, 또 일반적인 것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한사코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현실의 사람이라며 농담을 하셨지만, 많은 이들의 말문을 열게 한 포용력을 가진 어른의 우아함은 감출 수 없었다. 언젠가 인터뷰를 청할 날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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