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크나인 Feb 22. 2021

아내의 언어

집중해야 들을 수 있다

결혼하고 깨달은 사실 하나가 있다.

아내가 내게 쓰는 언어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과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바로 '아내의 언어'다.


여자와 남자가 쓰는 말의 뉘앙스나 각자 말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아내의 언어는 확연히 다르다.


아내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허투루 듣고 넘어갈 단어가 하나도 없다. 지시대명사 하나, 조사 하나 신중히 들어야 그 정확한 뜻을 파악할 수 있다. 목소리 톤이나 끝맺음이 올라갔는지 내려갔는지도 중요하다. 집안에 싸늘한 냉기가 흐르느냐, 웃음 가득한 온기가 넘치느냐는 여기에 달렸다.




우리 부부는 토요일 아침이면 맥도널드 맥모닝 세트를 즐겨 먹는다. 다이어트 중이지만 평일 동안 잘 견딘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자 늦잠 자는 토요일 대신 조금이라고 긴 하루를 보내기 위해 언제부턴가 “토요일 아침=맥모닝 세트” 공식이 성립됐다.


지난 토요일도 우린 눈을 뜨자마자 맥도널드로 향했다. 소시지 에그 맥머핀과 해쉬 브라운, 핫케이크 세 조각 그리고 아내는 아메리카노를, 나는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아직 아침에는 쌀쌀한 기운이 있어 커피는 따뜻하게 마시기로 했다. 아내가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마쳤고, 나는 아내에게 2층에 먼저 올라가서 자리를 맡아 앉아 있으라고 했다.


“1062번 고객님. 주문하신 맥모닝 세트 나왔습니다”

주문한 세트 메뉴를 확인한 후 한가득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해쉬 브라운을 머핀 사이에 넣고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쫀득하고 고소한 식감이 입 안에 퍼져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맛있다” 연발하며 커피도 한 모금씩 했다.


맛있는 맥머핀을 몇 입 먹었을 때였다.

“오빠, 시원한 사이다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

“그러네. 목이 좀 막히는 것 같네”

잠시 뒤 “아직도 안 갔어?”

“응?”


아차 싶었다. 그랬다. 사이다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는 지금 마시고 싶으니 당장 1층 키오스크 앞으로 내려가 스프라이트 라지 사이즈를 클릭하라는 뜻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나도 목이 막혔지만) 우리에게 아직  커피가 남아있고, 얼마 전 주문한 제로콜라가 집 냉장고에 꽤 있었기 때문에 집에 가서 시원하게 한잔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틀렸다. 아내의 언어에서 이건 정답이 아니었다.


“했으면 좋겠다~”는 하겠다는 말이다. “마셨으면 좋겠다~”는 마시고 싶다는 것이다. 아내의 언어는 직접적이지 않다. 간접적으로 에둘러서 말한다. 권유문이나 바람, 희망의 형태를 사용해 남편을 혼동 속에 몰아넣는다. 하지만 정신만 차리면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아내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내뱉는 말뿐만 아니라 그 말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봐야 하고, 내 행동 이후 아내의 반응도 미리 계산해야 한다.

맥머핀의 달콤함에 빠져 있느라 아내의 언어를 이해하는 회로가 일시 정지된 듯하다.

여기서 정답은 “그렇지? 나도 시원한 탄산이 당겼어. 가서 한잔 사 올게. 라지 사이즈면 되겠지?”다.


어느 날은 함께 TV를 보고 있는데 아내가 그들의 언어로 말을 걸었다.

“오빠. 저것 좀 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뭘 달라는 거지?' 그때부터 아내의 상황을 살핀다. 손의 모양과 위치를 살피고 아내의 표정을 본다. '리모컨을 찾나? 아니 바로 옆에 있는데' 입술을 본다. '목이 마른가? 저녁 먹은 지 얼마나 됐지? 지금 정도면 출출할 시간이기는 한데, 간식인가?'


아내의 손이 가리키는 쪽에 여러 물건들 중 한라봉 하나를 집어 건넸다. 아내가 받았다.

'예쓰~!! 맞았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까줬으면 좋을 뻔했는데...”

아직 나는 부족하다.


그래도 이런 문제는 조금만 신경 쓰면 정답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어려운 것은 양자택일이 필요한 경우다.

휴대폰을 보던 아내가 말한다. “오빠. 고기 먹고 싶은데 삼겹살 먹을까? 아니면 차돌박이 먹을까?”


침착하자. 먼저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생각해보자. 삼겹살이 먹고 싶다면 왜 삼겹살이 당기는지 아내에게 얘기하면 된다. 그러면 아내도 삼겹살 쪽으로 기운다.


문제는 삼겹살이든 차돌박이든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을 때다. 그럴 땐 아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삼겹살 일지, 차돌박이 일지 고민한다. 소고기를 좋아하는 아내가 돼지고기와 고민한다는 건 돼지고기가 조금 더 당길 가능성이 높다. 51%대 49%의 확률이라면 51%로 가야 하지 않을까. 조심히 삼겹살로 의견을 제시한다.

“그렇지? 나도 오늘은 삼겹살이 조금 더 먹고 싶네. 삼겹살 먹으려 가자~”는 말이 돌아온다.


나는 음식에 있어 호불호가 없다. 짜면 짠 대로 싱거우면 싱거운 대로 먹는다. 점심때 먹은 김치찌개를 저녁 식사로 또 먹어도 상관없다. 그래서 웬만하면 아내가 먹고 싶은 것 위주로 먹으려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사항은 내 의견이 없으면 안 된다. 왜 그걸 먹어야 하는지 성의 있게 대답하는 것 또한 굉장히 중요하다. 대화의 기본이다.

귀찮은 듯 “그냥 아무거나 먹자”는 절대 안 된다. 부부 사이를 틀어놓는 대부분이 무관심, 귀찮음이다.


사실 결혼 초기에는 이런 문제로 종종 다퉜다. 나는 결혼하기 전 7년 정도 혼자 살았기 때문에 집에서는 뭐든 혼자 하는 게 좋았다. 요리도 혼자 하고 분리수거도 혼자 하고 청소도 혼자 하는 게 편했다. 아내에게 물 좀 달라, 커튼 좀 쳐달라, 시시콜콜하게 시킨 적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다. 반면 아내는 함께 하길 원했다. 아내가 요리하면 내가 옆에서 이것저것 양념도 건네주고, 간도 봐주고 주변 정리도 해주면 그렇게 좋아했다.


그때 느꼈다. 이게 뭐라고. 끝까지 내 고집을 내세울 게 아니라는 걸 말이다. 아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해줬을 때, 아내가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캐치해 해결했을 때 미소 짓는 아내가 무척 좋았다. 그런 아내를 보면서 내가 행복해한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자고 다짐했고 그렇게 노력해가고 있다.




“뭔가 매콤하고 칼칼한 게 먹고 싶네” 점심 메뉴를 고민하다 아내에게 말했다.

아내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배달 사이트를 뒤져 “낙지 어때?”라고 물어온다.

“낙지? 오~ 오랜만에 낙지 좋다~”


딩동. 배달 음식을 받아 세팅을 하는데 낙지볶음 말고 다른 게 더 있었다.

좀 전에 TV에서 파전이 나왔는데 내가 “맛있겠다”라고 작게 속삭인 소리를 아내가 들은 것이다.

“오빠가 파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낙지 파전 같이 시켰어. 맛있겠지?”


참 고마운 아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친다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