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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크나인 Jul 15. 2021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느낀 천생연분

우리는 운명일까?

늦은 저녁.

해와 달이 자리를 맞바꿀 무렵 반려견 '설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산책에 나섰다. 날이 조금씩 더워지면서 낮에는 산책이 힘들어, 해가 지면 이렇게 나와 한 손은 아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은 반려견 '설이'의 하네스를 쥐고 밤마실을 나온다.


천천히 걸으면서 싱그러운 풀내음도 맡고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고 상쾌한 기분이 든다. 꽉 막힌 실내 공간이 아닌 야외 공간에서의 대화는 우리 부부의 마음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하다.


해가 사라졌는데도 습한 날씨 탓에 땀방울이 조금씩 흘렀다. 다이어트를 위해 저녁 식사를 단백질 셰이크로 대신한 우리는 약간의 허기를 느꼈지만 참기로 했다.


얼마간의 적막이 흐른 뒤 아내가 입을 열었다.

“오빠.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래?”


'다이어트 기간에, 그리고 이 시간에 아이스크림이라니? 진심이야?'라는 이성적인 머리와는 달리 본능적인 입은 이렇게 말을 한다.


“오~ 입이 좀 심심~했는데 아이스크림 좋다~”


“그렇지?” 아내는 웃어 보였고 우리는 집 앞 아이스크림 전문점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이곳은 아이스크림뿐 아니라 과자나 초콜릿 같은 간식류도 취급한다. 간혹 아이스크림이나 달달한 무언가가 생각날 때면 슬리퍼 신고 부담 없이 찾는 가성비 좋은 가게다.


아내는 미소를 띠며 잽싸게 가게 안으로 들어섰고 나는 설이와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머리를 곱게 땋은 여자 아이가 행복한 표정으로 엄마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려견 '설이'가 우리에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족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기에 공용 공간이나 타인이 있는 실내 공간에는 가급적이면 설이를 데리고 가지 않으려 한다.


원하는 아이스크림을 손에 넣었는지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가게 밖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아내는 아직도 아이스크림을 바구니에 담지 못하고 이쪽저쪽을 기웃거렸다.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보다 못한 나는 설이를 들쳐 안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초코나 팥이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나는 다양한 아이스크림을 쭉 훑어보다가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발견했다. 바로 '녹차 앙코바'였다.


진한 녹차향과 달콤한 팥이 부드러운 아이스크림 속에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얼른 아이스크림 봉지를 뜯고 싶은 욕망이 올라왔다. 그러면서 “녹차 앙코바 맛있겠다~” 아내에게 말했더니 아내는 “오~ 어떻게 알았어? 내가 찾던 게 그거였어~ 어디 있어?”하고 환한 미소를 보이며 다가왔다.


'녹차 앙코바'를 4개나 바구니에 담은 아내는 다시 한번 내게 말했다. “내가 먹고 싶은 거 진짜 어떻게 알았어? 신기하다.”라며 놀라워했다. 우쭐해진 나는 나는 “내가 왜 모르겠어~ 그러니까 우리가 천생연분 아니겠어?”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사실 아내와 2년 동안 연애를 하고 결혼한 뒤 5년간 함께 살아오면서 '이런 게 운명인가? 진짜 우리는 천생연분인가?'라고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내가 속으로 흥얼거렸던 노래를 아내가 조그맣게 부른다든지, 들기름 막국수가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아내가 “우리 막국수 먹을래?”라고 물어올 때 그런 생각이 든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아내의 주민등록번호를 본 뒤였다. 나는 숫자 '2005'에 남다른 애착이 있다. 포병(자주포 조종수)으로 군 복무할 때 나에게 주어진 자주포의 넘버가 바로 '2005'였다. 거의 2년 동안 닦고 조이고 기름치며 동고동락하다가 전역하는 순간 다시는 '2005호'를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전역 후 새로운 휴대폰을 장만하면서 휴대폰 뒷자리 번호를 2005로 바꿨다. 운전을 하고 가다가도 2005의 번호를 가진 차를 보면 반가우면서 부러운 마음도 있었다. 그러다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 때문에 아내의 신분증을 확인하는데 아내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2005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2005XXX. 


지구에 살고 있는 60억 인구 중에 이 순간만큼은 나만 알고 있고, 나에게만 해당하는 유일한 스토리가 아닐까 한다. 두 팔에 소름이 돋았던 그 순간을 아직 나는 기억한다.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까?”


아이스크림을 사오자마자 냉동실에 넣어두고 깜빡하고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을 먹자는 아내의 말에 '아차'싶었다.


“내가 꺼내 줄게~”

'녹차 앙코바' 봉지를 뜯어 아내에게 건네자 아내는 한입 베어 물고는 “오~ 맛있다~”라고 말했다. 아내의 이마부터 미간과 눈과 뺨과 인중과 입과 턱에까지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 게 보였다. 그렇다. 나와 천생연분인 아내의 미소는 언제나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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