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집에서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아빠의 책상 아래였다. 네 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데 지친 엄마는 맏이인 나한테까지 관심을 쏟을 에너지가 부족했다. 그리고 내가 좀 어지르는 걸 참아주는 법이 없었다. 종이인형으로 애써 인형놀이를 하려고 꺼내 놓으면 당장 치우라고 성화였고 그림책을 쌓아 집을 지으면 당장 도로 갖다 놓으라고 화를 냈다.
그때마다 아빠의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네모나고 작은 공간은 몸집이 작은 내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 등을 기대면 외갓집 다락방처럼 아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라면 박스 가득 편지가 들어 있었다. 나는 어두컴컴한 책상 아래서 박스에 손을 넣어 편지를 꺼내 읽었다. 편지봉투에 붙은 우표를 떼어내는 것도 좋았지만 편지를 읽는 일이 나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여고생들이 보낸 편지에는 우리 아빠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가득했다. 주로 방학 중에 써보낸 편지들이라 지난 학기에 대한 반성과 다음 학기에 대한 결심과 다짐 그리고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게 편지의 주된 내용이었다.
내가 전주에 있는 국민학교로 전학하기 전, 2학년 3월까지 2년 연속 우리 반 담임이셨던 강금주 선생님께 편지를 썼을 때, 엄마는 편지에 이렇게 덧붙이라고 했다.
‘선생님, 제가 아빠께 온 편지를 읽고 많이 따라서 썼어요. 건방지다 생각지 마시고 읽어주세요.’
나는 억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엄마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이거 수빈이가 전해 드리래요.”
1학년 5반 담임선생님이 편지 봉투를 내밀었을 때, 나는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으앗’하고 소리쳤다.
내가 중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편지는 수빈이가 과학시간에 만들었다는 카드인데 눈사람 코에 불이 들어온다.
본관 중앙현관에 전시된 그림을 칭찬했더니 수빈이는 ‘선생님 덕분에 제 꿈에 대한 확신이 생겼어요.’라고 적었다.
아이들은 주로 방학 전에, 연말에 도서관에 와서 슬그머니 편지를 내밀었다.
“지금 읽으시면 안돼요. 이따 읽어보세요.”
나는 편지를 받을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을 애써 누르며 일부러 명랑하게 말한다.
“아이고, 감동이다. 우와, 고마워.”
그러고는 부지런히 서랍을 뒤져 줄 것이 없나 찾는다.
얼마 전에 3학년 채령이가 ‘선생님 드리려고 제가 편지를 썼어요.’하고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나는 도서관 서가 교체로 바쁘고 고달픈 날을 보내고 있었고 퇴근 후에는 거의 매일 줌 강의를 듣고 있었으므로 이틀 뒤 방과 후에 잠시 보기로 겨우 약속을 잡았다.
채령이가 건네준 봉투 안에는 제비꽃이 그려진 카드가 들어 있었다. 채령이는 평소 나를 자주 꽃에 비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