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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러스씨 Mar 07. 2021

[9] 희망은 가장 절망한 사람의 것이다

⏤ 가장 염세적인 사람이 가장 쾌활할 수 있는 역설에 대해서




중고서점에 들르면 어떤 매물들이 많이 풀리는지 자연히 보게 된다. 요즘은 산문집이 단연코 많다. 요즘 유명하다는 특정 작가의 책이 한 줄을 다 채워놓은 것도 봤다. 읽어보면 공통점이 확연하다. 대부분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주제로 많이 쓰는 것 같다. 일본에서 십여 년 전에 유행했다고 하는 사소설의 흐름이 동해를 건너오면서 에세이로 바뀐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밍숭맹숭한 상태, 다시 말해서 싱거움과 쿨함을 가미한 탄산수 같은 태도를 지향하는 전반적인 흐름이 분명히 있다. 이런 책의 표지 역시 공통점이 있는데, 먹선을 굵게 먹이고 디테일한 기교를 거의 배제하고 보색 대비되는 톤으로 색을 입힌다. 일부러 러프하고 아마추어한 느낌을 살린 그림도 자주 보인다. 좋게 말해서 평범하고 사소하고 사적인 것에 골몰하고 거기서 의미를 발견하려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할 수도 있고, 좋지 않게 말하면 사람들이 평소 정신적으로 지쳐있기 때문에 책에서까지 복잡함(+갈등)을 바라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도 그 부분이다. 요즘 나오는 글을 보면 놀랍도록 가볍고 일상적이어서 읽고 나면, 그 어떤 것도 기억에 남지 않고 금세 휘발된다. 엄지로 스와이핑 하고 픽픽 웃어넘기면서 '뭐 그런갑다' 하는 식으로 흘려보내는 유머사이트의 키치(kitsch) 이상이 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무거운 상황을 널찍이 떨어져서 소비하면서, 그 모든 상황을 참신한 몇 가지 밈으로 표현하는 글이 대다수라서, 읽다 보면 금세 피로하다. 이 과도한 '너는 너 자체여도 좋아' 하는 식의 힐링을 가장한 긍정성이 마냥 반갑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정말로 본인이 원해서 선택한 삶의 태도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내 생각에 이런 '보편' '평범' '사소함'에 대한 과도한 숭앙은 미니멀리즘과 구분해서 봐야 한다. 미니멀리즘은 꼭 필요한 한 가지를 선택하기 위해서 무한대의 바닷속에서 건져 올린 단 하나다. 이때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포기이기 때문에 가치를 얻는다. 가장 높은 감정 상태를 가장 미니멀한 방식으로 표현할 때 얻어지는 그 긴장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모래 한 알이 바다를 머금고 있다는 말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즈음의 사소함은 그냥 궁지로 내몰린 사람이 정신적으로 탈진해서 백지상태가 돼서 내비치는 단순함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두말할 것도 없이, 생각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것과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 전혀 다르다. 과도하게 평범을 지향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마치 물과 같은 평온한 감정 상태를 지향하는 이런 태도는 현 상황에 대한 체념과 '어차피 해도 안 돼' 하는 식의 패배주의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다. 가로막혀서 고여있는 물의 완벽한 수평처럼.





힘든 시기라는 걸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열정은 착취당하고 노력은 보답받지 못한다. 이젠 누가 열정과 노력이라는 단어를 들먹이기만 해도 엎어놓고 의심부터 하게 되는 요즘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게 어떤 분야든 열정을 쏟으려고 하고 더 잘하기 위해서('더 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으면서) 고투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더 응원하게 된다. 누구나 인정하는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 별개로, 열심히 한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기 안에 남아서 앞으로 삶을 꾸려가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고도 믿는다. 열정과 노력이라는 단어가 촌스러워진 세상이지만, 그건 열정과 노력이 무용하거나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짜로 해야 할 일은 노력하고 열정을 가진다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 물으면서, 더 노력하고 열정을 갖고 더 건강하게 욕망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제껏 386세대나 IMF세대들이 '착취'와 뒤섞어서 막 써 버릇해온 노력과 열정이라는 단어에 씌인 그늘을 걷어내는 일이다. 나는 세상의 수요와 관계없이 자신이 헌신하고자 하는 분야에 앞뒤 재지 않고 열정과 노력을 투입하는 사람들이 더 득세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요즘 말하는 '펀쿨섹'은 관심사가 아니다. 슴슴하게 살고 싶지 않고 더 강렬한 상태를 맛보고 싶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작은 일에도 울고 웃고 과민 반응하면서 살고 싶다. 그래서 너무 사소한 자기를 자랑스러워하고 긍정하는 저 열정들이 가끔 무섭다. 그런 것들을 '거대담론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기고 간 균열은 메우는 작은 모래 알갱이'라고 치장하는 말들을 의문한다. 차라리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더 큰 무언가를 꿈꾸고, 거기에 좌절해보고 펑펑 운 다음에 또다시 의연하게 도전하는 사람들의 등을 보고 싶다.

   일본의 젊은 석학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2010년대 초반, 거의 모든 사회적 지표가 지독한 불황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젊은 층 사이에서 기묘할 정도로 행복도와 만족도가 치솟는다는 사실을 진단하며, 그들이 지향하는 행복과 만족이 기실 뿌리 깊은 패배주의와 '더 해도 어차피 안된다'는 체념의 결과임을 역설했다. (이들은 오늘날 사토리세대(さとり世代), 즉 내몰린 초연함으로 무장한 젊은이들로 불린다.) 요약하자면 지금 불안하지만 더 해도 될 것 같은 여지가 있다고 느낄 때 사람은 깊게 절망하고, 그런 절망을 적극적으로 바깥으로 내비친다는 것이다. 이때 깊은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는 한 세기 전, 벤야민이 희망은 가장 절망한 사람의 것이라고 했다는 내용과 일맥상통한다(언젠가 메모해뒀던 것인데 출처가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찾을 수가 없다). 1940년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을 시도하기 위해서 프랑스를 탈출하던 중 스페인 국경 통과가 좌절되자 자신이 묵고 있던 허름한 호텔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오늘에 와서도 우리는 벤야민이 남긴 저작들을 읽고 연구하고 있다. 희망은 그렇게도 온다.



 


"사랑이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 때, 사랑의 본래 계획에는 행복이란 절대로 없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는가. 역설적이게도 가장 염세적인 사상가들이 가장 쾌활할 수도 있는 법이다."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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