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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러스씨 Mar 07. 2021

[10] 초심(初心)을 지키라는 이상한 말

⏤ 습관적으로 서로 초심을 권하는 우리에 대해서




   찾아야 할 초심(初心)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 보기엔 초심처럼 함정카드 같은 말이 없는 듯하다. 초심 운운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꼭 흘러간 물을 다시 거슬러가서 되찾아오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처럼 허황되게 보인다. 아무것도 없을 때의 그 패기넘치고 당찬 마음가짐을 되찾고 싶은 생각에서 그렇게 말하고 또 남에게 초심을 권하는 걸 알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을 다 감안하고서라도 어느 정도 성취를 이뤄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고 주먹 두 개 다리 두 짝 있던 시절로 되돌아가서 뭘 해보겠다고 다짐하는 게 더 기괴한 짓 같다. 그게 더 부자연스럽다. 한 단계를 넘어선 다음의 한 시기는, 거기에 맞춤한 모습이 있을 것이고 그 모습은 당연히 처음과 같을 수가 없는 거 아닌가. '선 자리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도 바뀌는 법'이라고 들었다. 물론, 나는  (분명히 말해두지만) 상황에 따라 제 잇속만 챙기려고 박쥐처럼 이랬다 저랬다 하는 태도를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신 이렇게는 말해 보고 싶다. 사람은 각 시기에 걸맞은 모습과 태도가 있는데, 많은 경우 문제는 그 시기에 맞춤한 모습으로 스스로를 조정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이지 초심을 잃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예컨대 관계에 있어서 권태감에 시달리는 커플이 주구장창 초창기의 설렘에 대해서만 얘기한다고 하면, 그건 재앙의 아가리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청년 커플의 사랑과 노부부의 사랑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사람 또한 그 시기에 걸맞은 모습이 있을 뿐이다.


   예전에 바른 언행으로 주목받고 인기를 끌었던 한 대형 스트리머가 방송 태도와 관련해서 논란이 불거져서 사과방송을 하는 것을 봤다. 대부분의 사과방송이 그러하듯 스트리머는 앞으로 초심을 찾겠으며, 처음처럼 시청과들과 소통도 하고 성실히 방송에 임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보면서 굉장히 안타까웠다. 모르긴 몰라도 앞으로 더 힘들어질 가능성이 농후해보였다. 알다시피 문제가 밖으로 터져나왔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인 경우가 대다수다. 해당 스트리머는 이전에 혼자서만 방송하던 시절과 비교해서 인지도가 달라졌고 이미 직원들을 거느리면서 회사 규모로 비즈니스를 하는 단계로 넘어가 있었는데, 그 상황에서 어떻게 다시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저렇게 바르고 똑똑한 사람도 '초심'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스스로 허우적거리는구나 싶었다. 초심이라는 말은 우리를 억압한다. 그 최초의 뜻은 좋았겠으나 곡해된 측면이 너무 크다. 초심을 찾겠다는 당사자만큼이나, 남에게 습관적으로 초심을 권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사람이 그렇게 일관되게만 살아가지도 않고 일관된 게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라고. 때론 상황에 따라서 달리 대처하고 행동하는 것이 더 필요한 태도일 수 있다. 링컨은 노예해방 선언을 하기 불과 몇 해 전에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예 제도를 함구한 적 있었는데, 그래서 이후에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파에게 정치적인 공격을 당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훗날 꿋꿋이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훗날 운동가 알린스키는 이런 링컨의 행동이야말로 정치인으로서 미덕을 갖춘 행동이라고 말했다.




   "입장을 전환한 링컨의 윤리적 태도에 대해 아마도 비판을 가할 사람들은, 원칙이나 입장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해 사람이 한결같고 헌신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는 세상이라는 이상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다. 실제 인간사의 정치에서, 일관성은 미덕이 아니다. 옥스퍼드 대사전에 따르면, 일관성이 있다는 것(to be consistent)은 “정지하고 있거나 움직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시대에 맞추어 변화하거나 죽거나 해야 한다."

    ⏤사울 알린스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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