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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으른 러스씨 Mar 09. 2021

[13] 예술가의 광기와 감정기복

⏤ 예술가라는 이미지에 대한 해묵은 오해





   "알코올 중독자이면서도 예술가인 사람은 그 자신의 알코올 중독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예술가가 된 것이지, 알코올 중독이기 때문에 예술가가 된 것이 아니다."

    ⏤레이먼드 카버(소설가)




예술가들은 감정기복이 심하고 과민하며 대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같은 게 있어서 약을 달고 산다는 건 편견 같다. 내가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그렇다. 비교적 꼼꼼한 구석이 있고 혼자 사부작거리며 공부하는 일이 많은 만큼 작은 차이에 민감하고, 작품이 잘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어서 스스로 자학하는 경향이 있긴 한 것 같다. 하지만 매번 감정기복이 무슨 미친년 널뛰듯 하고, 손목엔 주저흔이 꼭 하나쯤 있고, 아점저로 자낙스를 물 없이 털어 삼키는 그런 이미지는 대부분 허구라도 봐도 무방하다. 만약 주변에 스스로 예술한답시고 주변에 유난히 짜증을 잘 부리고, 감정기복이 심하고, 걸핏하면 먹고 있는 약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같이 술 마시자는 사람이 있는데 "예술가들은 원래 좀 그래" 하는 뉘앙스를 풍기고 다닌다면, 그 사람은 그냥 성격이 이상한데 우연히 예술도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술이란 말 자체가 볼드모트 같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대개 스스로 예술한다고 말하길 꺼린다어른이 자기 이름을 3인칭으로 말하면 역겨운 것과 같다.)


성격이 박살나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고, 반대로 성격이 거의 지장보살인 사람도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격이야 가지각색이다. 조금 거창하게 말해서, 어떤 인간성의 끄트머리에서도 작품이 나오고 어떤 인간성을 시작 삼은 지점에서도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 예술의 특성이라면 특성일 것이다. 러셀 옹(翁)도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는 힘은 기질적인 불행과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하긴 했다. 하지만 이 말을 곡해하면 안 된다. 기질적인 불행과 위대한 작품 사이에는 미약한 상관관계가 있을 뿐 또렷한 인과관계가 없다. 불행했던 모든 사람이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도 아니고, 위대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 인생이 불행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자칫 이런 사실을 혼동하기 시작하면 '예술뽕'이라는 골 때리는 병에 걸리는데(환절기 감기 수준으로 흔한 '홍대병'도 여기 속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을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과시적인 우울, 불행을 쥐어짜는 듯한 포즈, 의무가 된 강박 따위가 대표적인 증상이다. 자기 병증을 과장하고 전시하려는 욕망도 보인다. 이때, 작은 차이에도 민감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식의 편협함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날카로운 것과 좁은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진짜 자기 불행을 작품 활동을 하면서 견디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가롭게 남의 불행을 흉내 내면서 어쭙잖은 예술가 행세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굉장히 화날 것 같다. 예술가는 불행을 잘 느끼는 사람일 순 있지만 불행을 부러 제스쳐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이름만 대어도 다 알 법한 훌륭한 작가들 중에서는 굉장히 성실하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조용히 작업을 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삶은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고, 그래서 뭇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이 도스토옙스키처럼 도박과 술에 중독되었거나 고흐처럼 자기 귀를 잘라버렸던 건 아니다. 그런 광기에 찬 예술가의 이야기도, 그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대의 어떤 요구에 부응해서 사후적으로 만들어지고 부풀려진 경우도 많다. 어쭙잖게 예술한답시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나 그런 구성된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온갖 포즈를 잡는 것이다. 약간 불쾌하기까지 하다. 그건 남의 생래적인 장애를 소재로 프릭쇼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대부분의 사려 깊은 예술가들은 자기 광증을 바깥으로 내비치는 것을 경계한다. 자기 치기조차 예술의 한 부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술가라기보다는 그냥 어리광을 피우고 있을 뿐이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들을 사랑하고 고흐가 자신의 형에게 보낸 두툼한 편지들을 읽으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묵묵한 회사원처럼 매일 자기가 가치 있다고 믿는 일을 가치 있다고 믿는 방식으로 해나가는 사람들을 더 높이 친다. 예술은 광기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룬다. 아니, 많은 경우 광기는 예술이 아니다. 정신병동을 예술가촌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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