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공연예술을 공부했었다. 동료들과 만들어가는 연극작업이 그렇게도 재밌었다. 달랑 대본 하나를 시작으로, 연습실에서 밤낮 새워가며 인물을 창조하고 극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참 좋았다. 극에 맞는 음악을 찾고, 소품과 의상을 구하러 시장을 돌아다니고, 톱 들고 무대 세트를 만들었다. 고된 노력 끝에, 극장에 완성된 작업을 올릴 땐 정말이지 짜릿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냈다는 것에 기쁨을 맛보곤 했다. 연극이 끝나 무대에서 내려오면, 곧 다음 공연을 준비했다.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일까.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영업사원의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회사의 주먹구구식 시스템 속에서, 맨땅에 헤딩해야 했다. 우리 제품을 필요로 하는 곳에 전화하는 것으로 시작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끊임없이 연락해, 시황을 업데이트해 주고 판매 의지를 내비쳤다. 각고의 노력 후 계약서에 바이어의 사인을 받을 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 번은 대기업 경쟁사를 제치고 6억 원짜리 꽤 큰 계약을 맺었었다. 고생해서 만든 연극무대 위에 주연배우로 올라간 것처럼 황홀했다. 그리고 다음 계약을 찾아 또다시 영업을 뛰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멋진 공연이 끝나고 빈 무대를 바라보면 마음속이 어딘가 허전했다. 도장 찍힌 계약서를 상사에게 보고하고 난 후에도 그랬다. 물론 다음 공연과 계약을 찾아 떠났다.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신나게 타고 난 뒤에, 바로 자이로드롭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3분간의 짜릿한 자이로드롭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또다시 공허함이 스며들었다. 이다음은 바이킹을 타야 하는 건지, 번지점프를 해야 하는 건지, 내가 어째야 할지를 몰랐다. 분명 이게 행복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떨 때는 오히려 불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공허했다.
지금껏 기쁨과 행복을 같은 개념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이루어 낸 후에 오는 기쁨을 ‘삶이 행복하다’로 치환해 왔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고, 그래서 성취와 기쁨, 짜릿함을 추구하는 내가 행복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기쁨과 행복은 다른 감정이었다. 기쁨이 수직적인 감정선이라면, 행복은 수평적인 감정선이었다. 수직적인 것은 금세 눈에 띄지만, 무엇이든 솟아오르고 난 후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수평적인 것은 잘 돌출되지는 않지만, 우리의 일상 곳곳에 녹아 있으며 쉽게 등락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기쁨을 위해 수많은 행복을 지나쳐 왔는지도 모른다. 월요일 아침 잠이 덜 깬 사무실 동료들, 점심시간에 피운 담배 한 개비, 엄마가 끓여 주신 된장찌개. 아무렇지 않게 반복되는 것들이라 어떠한 성취감이나 기쁨도 없다. 하지만 내 안에 귀를 잘 기울여 보면, 수평적인 물결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쳐버린 그것들은, 내가 찾아서 얻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어디선가 본 글귀처럼, 별을 보려거든 하늘을 보지 말고 땅을 보면 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별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