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걷는다 (8)
여행에서 돌아오면, 짐을 풀고 여행 중 찍었던 사진들도 푼다. 짧은 여행이어도 여독이란 게 있더라. 여행을 했던 시간만큼 쉬면서 여행 중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는다. 나름의 정리 기간이다.
집에서 차를 끓여 마시고, 책을 읽으며 휴식하는 것을 즐겨한다. 게을러도, 계획형이라 가만히 쉬는 걸 잘하지 못한다. 폰을 하루 종일 보지 않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는 못할 것 같다.
백수 신분으로 집 밖을 나가는 걸 두려워한 적이 있다. 내 이마에 '백수' 두 글자가 주홍글씨처럼 새겨있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집안에만 있기에는 시간이 아까웠다. 쉽게 우울해지는 편은 아니었다. 기분이 멍해지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오기 전에 미리 짐을 간단히 챙겨 집을 나섰다. 내 발은 기차역이나 공항을 밟고 있었다. 내 마음은 여행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찼다.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우울증이 오냐는 것에는 확실히 그렇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저 삶이라는 시간이 주어졌고, 세상에는 아직 내가 보지 못한 게 너무 많다. 삶을 제대로 여행하기 위해서는 여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상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몸으로 부딪혀야 믿는 편이다.
평일 아침, 집 근처 스타벅스를 찾았다. 스벅에서 준 생일 기념 무료 음료 쿠폰을 쓸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미리 사이렌 오더로 주문을 해놓고, 느긋하게 들어갔다. 내가 간 곳은 직장인들이 많은 광화문에 있다. 평일이나 주말, 또는 낮밤 상관없이 사람이 많고 분주하다. 출근 시간과 맞물리지 않게 스벅을 찾았다.
백수의 유일한 낙이다. 주문한 플랫 화이트를 마시며 읽고 있는 책을 들었다. 카페 asmr 영상을 따로 틀지 않아도 된다. 타인의 말소리, 음악소리, 커피 머신 소리가 오케스트라 반주처럼 적절히 섞이며 어우러졌다.
카페를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장인들. 그들과의 다름에 왠지 들떠진다. 나는 한결 더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쳐 앉았다. 책 페이지를 커피 한 모금 음미하듯 읽었다. 그들에게 에너지 드링크가 되어주는 커피는 내겐 그저 드링크. 스벅이라는 자유로운 공간이 그들에겐 직장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 일지는 몰라도, 내게는 그저 맛있는 커피와 책을 읽게 하는 공간이다. 나는 어딘가에 매여있는 사람이 아니야, 라고 백수가 유일하게 자랑할 수 있는 이곳은 아이러니하게도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쾅'
사원 직급으로 보이는 한 여성 분이 서류들과 파일을 테이블 아래로 떨구었다. 플라스틱 파일로 보이는 건 그 여성 분의 것은 아니었다. 맞은편의 팀장처럼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여성분이 잘못한 건 맞지만, 눈치를 주는 이 분위기가 참 싫다 싶어 얼른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한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한 배를 탄 동료가 아닐까. 선배라는 이유로 한 번 더 갈구고, 못마땅해하고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것. 나도 여러 번 눈칫밥을 먹었다. 사과를 밥 먹듯이 하고, 한소리 듣고, 그럴싸한 이유를 들어 불합리한 계약서를 쓰게 하고. 모든 걸 당연하듯이 해대는 사람들이 있어서 나는 한동안 회사가 무서웠다. 요즘엔 같은 길, 같은 목표, 그리고 같은 방향을 지닌 사람들을 찾는 게 더 빠르고 안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두워진 얼굴의 남자가 내뿜었던 무서운 기운이 사라지고 회의가 시작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파일은 무사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