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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제 Feb 08. 2021

내친소 : 내 친구를 소개합니다

곰의 탈을 쓴 깍쟁이



내 친구에 대해 좀 이야기해보려 한다. 지금 내 앞에 앉아서 그 비싼 아이패드와 함께 토익 공부 중인 섷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 중 한 명이다. 17살에 처음 알게 되었지만 그때보단 18살 같은 반을 하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우리는 죽이 잘 맞았다. 딱히 취미가 같지도 않고 성격도 판이했지만 어떻게 정말 잘 지냈다. 같은 반이었던 한 해동안 정말 행복하게 즐기고 먹고 놀았다. 공부도 간간히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많은 남사친들 중에 좀 더 친한 남사친 1이었던 그가 내게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 시기가 있다. 


바로 고3 시절이다. 고등학교 내내 공부를 어느 정도 했던 나는 고3이 되면서 학업 스트레스에 반쯤 미쳐가고 있었다. 하물며 여기 지역 애들은 다 받을 수 있는 농어촌 혜택도 딱 1년이 모자라서 받지 못해 일반 전형으로 입시를 준비해야 했다. 집안은 유일한 고3인 나에게 모든 것을 서포트해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학원 한 번을 안 다녔다. 이렇게 페널티를 안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억울함은 둘째치고 두려웠다. 정말 죽도 밥도 안되고 2016년 11월 이후에는 어떤 삶이 이어질지 상상조차 안됐다. 이렇게 흔들리던 날 잡아준 건 섷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독 정과 사랑이 많은 그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베푼 온정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워낙 주변 사람을 잘 챙기고 살가운 편이기에 만약 내가 아니라 한 학년 후배가 같은 상황이었어도 걘 그렇게 했을 거다. 그래도 나에게는 너무 고맙고 따뜻했다. 내가 힘들다고 징징거리면, 특유의 담담함으로 "엥, 너 당연히 붙을 거야. 너 공부 잘하잖아. 야 아니야, 할 수 있어." 했다. 얘는 꼭 내가 연세대는 등록금이 모자라서 못 가는 애처럼 말했다. 너무 당연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응원해줬다. 


사실 저런 멘트는 수험 생활하면서 흔히 듣는 이야기지만, 걔만의 표정과 말투에서 진심이 느껴질 때마다 두려움과 걱정으로 붕 뜨던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스트레스와 자존감 하락으로 쌈닭처럼 굴고, 이과 남자애와 싸우고, 선생님들에게 대들어도 한결같았다. 수시 6개 중에 5개를 떨어지고 샛노랗게 탈색을 하고 등교를 했을 때에도, 멋대로 학교를 빠질 때에도 항상 내편이었다. 


머리 잘 어울린다고 해주며, 엄마한테는 안 혼났냐고 물어보고, 아침마다 오늘 점심 급식 맛있다며 학교 나오라는 문자들이 나에게는 다 힘이 되었다. 어찌어찌 한 대학에 붙었을 때에도 옆 반에서 뛰어 들어와 "봐, 너 그 대학은 백퍼 된다고 했잖아. 진짜 축하해. 잘됐다."하고 본인 일처럼 좋아하고 안도해주던 애였다. 


그 와중에 주량은 또 얼마나 센지 학교에서도 유명했다. 언젠가 내가 "너 술 먹고 실수하는 날 보는 게 내 죽기 전 꿈이야."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면서도 술에 처참하게 패배해 휘청거리는 날 택시에 태워서 집에 넣어주고, 버스에서 토한 날 따라 버스 막차에서 내리기도 했다. 


이렇듯 보다 보면 마냥 순하고 착한 것 같지만 또 물 같지는 않다. 싫어하는 것도 많다. 예의 없고, 제 멋대로고, 허세와 센 척에 절은 껄렁거리는 또래 남자애들을 혐오한다. 예쁜 카페나 맛집을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가는 걸 귀찮아하는 집돌이기도해서 자주 만나기는 어렵다. 내가 몇 번 조르고 한참 전부터 약속을 잡아야 만날 수 있는, 한강뷰 레스토랑 같은 애다. 


그래도 내가 도전하고 좋아하는 일에 무조건적으로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난 그게 퍽 든든하고 고맙고 따뜻한데, 알지 모르겠다. 또 나도 그만큼 섷이 하겠다는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주접을 보낸다. 맛있고 좋은 걸 보면 항상 하나씩 포장해 그의 집에 선물하는 것이 나의 힐링 타임이다. 그렇게 해도 아직 나는 내가 받은 감정들의 반도 갚지 못한 기분이 든다. 


꼭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살아야지. 아마 난 섷이 장가를 가게 되는 날이면 꼭 사연 있는 여자처럼 곡을 할 것 같다. 멋지게 사회 봐주고 싶은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앞으로 우리가 취업을 하고, 직장을 가지고,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남과 한 집에서 새로운 공동체로 살아가는 순간이 와도 지금처럼 지냈으면 좋겠다. 너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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