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국, 아일랜드
8월 3일 오르세 미술관(오르세 미술관 Musée d'Orsay), 에펠타워, 센강 유람선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좋은 것을 접해도 겉으로 큰 반응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과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 친구와 나는 둘 다 후자에 속한다. 마음이 통하는 오랜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할 때 가장 큰 장점은 함께 맞장구를 칠 수 있는데서 오는 희열이다.
며칠 먼저 파리에 도착한 나는 커피와 빵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숙소 앞 빵집에서 금방 구운 크루아상과 에스프레소를 소개하며 기쁨을 느꼈다. “와~ 맛있다!”, “이야~끝내준다!” 라며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하니, 아이들과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여행이 다시 새롭게 시작된 것 같다. 사실은 아이들과 나도 여행을 시작할 때 가졌던 설렘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친구가 합류하니 길을 걸을 때도 훨씬 안전한 느낌이다. 프랑스의 인도는 폭이 좁은 경우가 많아 아이들과 나, 셋이서 다닐 때는 어쩔 수 없이 어린 아들과 내가 나란히 걷고, 딸은 뒤에서 혼자 걷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친구가 딸과 함께 걸으니 훨씬 마음이 놓인다.
숙소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오르셰 미술관을 시작으로 ‘관광’이 시작되었다. 여행과 관광을 구분 짓고 관광하는 사람을 좀 낮춰보는 시선도 있다. 여행과 관광의 명확한 구분은 무엇일까? 좀 더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 너무 알려진 관광지는 피하는 것?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왕이면 세련되고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 근데 누구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다는 건가?
어릴 때부터 막연하게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미술품을 감상할 때만큼은 시끄러운 내면의 소리들이 잠잠해지고 평온해진다. 나의 널뛰는 감정과 생각들이 마치 잔잔한 호수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다. 나에게는 어떤 심리 상담이나 약물보다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치료법인 셈이다. 또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부류의 사람이기도 하다. 언제나 아름다운 미술관을 방문할 때 연애를 처음 시작할 때만큼 설렌다.
친구를 위해 다시 한번 샹젤리제로 향했다. 유명한 찻집에 들어가서 시음을 해보고 선물을 고르기도 하고, 화장품 가게를 둘러보기도 했다. 딸아이가 말하길 “엄마가 이모랑 다니니까 더 당당해진 것 같아.” 어린이 둘을 데리고 다니면서 나는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는데, 어쩌면 나의 소심함을 보호자라는 방패로 가리고 있었던 것 같다. 나라는 사람 정말 겁이 많고 주변의 눈치를 보는 인간이다. 이제 친구가 내 보호자가 된 듯 당당하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고, 점원의 눈치를 보거나 손댄 물건은 반드시 구매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태연하게 물건을 구경하고 있다. 나라는 소심한 인간.
식당에서 피자와 멜론과 프로슈토를 함께 곁들여 먹는 요리를 시켜보았다. 사실 프랑스 남부의 야외 테이블이 있는 식당에서 먹어보고 싶었는데 아이들은 좋아할 것 같지 않아서 시키지 못했었다.
에펠 타워에 올라가기 위해, 1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왔는데, 줄이 심상치 않다. 오늘 어느 때보다 더위가 심하다. 아이들이 한국에서 가져온 손선풍기로 더위를 식히고 있으니 앞에 서 있는 관광객들이 부러워한다. 그건 어디서 살 수 있냐고 물어본다. 이후 영국에서도 이 손선풍기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한때 무역일을 하던 나로서는 유럽에 왜 아직 손선풍기가 판매되고 있지 않은지 내가 한번 팔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워의 가장 높은 곳까지 가려면 중간에 한번 엘리베이터를 갈아타야 한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많다. 생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져서 아쉽지만 끝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타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30분 후에 센강을 오고 가는 유람선에서 저녁식사를 예약해 두었기 때문이다. 일정을 너무 효율적으로 짰나 보다. 뜻밖의 많은 관광객에 당황스럽고 아쉬웠지만 중간에서 내려다보는 파리도 충분히 멋졌다.
다행히 선착장이 멀지 않아서 제때에 유람선에 오를 수 있었다. 유람선은 만석이었다. 모두 아름다운 이브닝드레스나 멋진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었다. 특히 한 커플의 외모와 분위기가 너무나 로맨틱하고 아름다웠다. 친구와 나는 서로의 소박한 차림새를 새삼 바라보며 멋쩍게 웃었다.
배가 서서히 출발했다. 첫 코스로 와인과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나는 유람선의 저녁 식사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낡은 배에 어수선하고 엉성한 뷔페 스타일의 식사를 예상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요리에 대해서는 대충이란 없는 듯하다. 하얀 식탁보가 깔린 고급스러운 테이블 위로 매 코스마다 정성스럽게 장식한 요리가 나왔고, 그 생김새만큼 맛도 좋았다.
유람선은 센강을 따라 미끄러지듯 흘러갔다. 강변을 따라 가로등과 건물의 불이 하나 둘 켜졌다. 해가 완전히 지고 실내에도 은은한 조명이 켜졌다. 불과 한 시간 전 무더위와 많은 인파에 지쳐 올라갔던 에펠타워에도 노란 불빛이 켜져서 황금빛으로 빛난다. 아쉽지만 이번에는 방문하지 못할 노트르담 성당도 밤에 더욱 아름답다.(안타깝게도 우리가 방문한 다음 해인 2019년 화재가 발생하고 만다.)
아이들도 유람선 내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즐기는 듯했다. 평상 시라면 벌써 서너 번 바르게 앉아야 한다는 잔소리를 했을 터인데, 시키지 않아도 부잣집 자제들처럼 반듯하게 앉아서 식사를 즐기고 있다. 엄마의 잔소리는 가장 비효율적인 훈육 수단이라는 것을 또 한 번 실감한다.
배는 출발했던 에펠탑 아래의 선착장으로 돌아와 우리를 내려주었다. 센강을 따라 천천히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변 노천카페에서 파티를 하는 사람들, 계단에 앉아서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들로 늦은 밤에도 심심하지 않다. 우리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또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걸었다. 다리는 아프지만 행복한 추억을 가득 만든 기분 좋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