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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주일의 순이 Jan 17. 2024

수순이 : 겸손은 힘들다(3)

2024년은 멋지고 당당하게

현재 나의 삶이 행복하지 않은 건 결혼 때문도

남편 때문도 아니었다. 나와 같은 운명이라면 누구든 불행 값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5살에 엄마를 잃었지만 난 엄마를 찾지 않았다고 한다. TV 속에 나오는 가수들의 노래나 따라 하며 춤을 추기도 하고 온갖 드라마를 줄줄줄 꾀고 있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TV였다.

4남매였기에 지루할 틈 없이 웃고 떠들고 놀고 싸우며 자랐다.


아버지는 면서기를 하다 농사를 짓겠다고 시골로 내려갔지만 엄마를 잃고 다시 광주로 왔다. 주변 친척의 도움으로 겨우 청원 경찰이 되었지만 4남매는 늘 가난하게 살았다.

청원 경찰 일은 말단이지만 나름 공무원이었다.

광주의 수돗물을 공급하는 수원지를 관리하는 일이었다. 착실하게 그 일을 했다면 4남매가 커갔으니 그래도 조금씩 나아졌을 텐데

아버지는 늘 술에 찌들어 살았다. 엄마가 살아있을 적에도 술을 좋아했지만 돌아가신 후로는 술을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시자마자 큰아버지는 이모더러 작은 언니를 맡아 키우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작은언니나 나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한  큰아버지 말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전쟁고아(나의 이모와 엄마는 9살, 3살에 부모를 잃었다.) 였던 이모는 8남매의 장남과 결혼해서 아들만 셋을 두었다. 이모는 우리들이 애틋했지만 이모부가  그 제안을 거절했다.

큰 집이나 작은 집 모두 아이가 셋인데 모두 2남 1녀라 딸이 있으니 같은 방을 쓸 수 있지만 이모네는 아들만 있어 따로 줄 방이 없다는 이유를 댔다. 하지만 실은 큰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는 맡지 않으면서 이모네에 우리를 미루는 게 괘씸했다고 한다.


그렇게 겨우 우리는 함께 살았다. 청원 경찰은 교대근무를 해야 해서 이틀 간격으로 아버지는 집을 비우셨다.  그 당시에 이미 일흔이 넘으신 꼬부랑 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 계셨다.

할머니는 우리를 많이 구박했다. 오빠는  귀한 귀남이로 대하고 우리는 쓸모없는 계집애가 되었다. TV에 나오는 따뜻한 할머니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큰언니에게 살림하는 걸 도우라고 했지만 언니는  안 하겠다고 뻗대니 할머니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할머니는 그런 언니를  포기해 버렸다. 마음 약한 작은 언니는 이기적인 큰언니와 철없는 나 사이에서 착한 아이 노릇을 하며 자랐다.


우리 집은 큰언니만 옷을 살 수 있었고 다른 집에서 물려받은 옷들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언니가  골라 입었다. 그리고 작은 언니, 내 차례 순으로 물려 입었다. 어떤 옷이라도 있는 대로 입어야 했기에 내 몸에 맞는 옷을 찾기도 어려웠다.  사춘기 아이들이 입는 브랜드옷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나는 그 시절의 가난을 기억하지만 그 기억이 그리 비참하진 않았다. 나는 내가 그렇게 살 듯 남들도 비슷하게 살아가는 줄 알았고 자존심 때문이라도 겉으론 부러워하지 않았다.

숨길 수 없는 것이 가난이라는데 그 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나는 사춘기에 접어들며 방황을 했던 것 같다. 지금 아이들 노는 수준으로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롤러장은 다니며 남자들을 만나기도 하고, 귀를 몰래 뚫기도 했다.

담임선생님께 로라장에 간 것을 들켜 매를 든 선생님의  손아귀가 찢어질 정도로 엄청나게 맞기도 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술에 찌들 대로 찌들어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시절 이미 아버지는 알코올중독 때문에 전문 병원에 여러 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릴 땐 그런 아버지라도 소중해서 병원을 따라다니며 병시중을 했었는데 중학생이 된 후 친척들은 그런 아버지를 포기한 듯 놓아버렸다. 나는 바깥으로 나돌고, 고등학생인 작은 언니는 야자까지 마치고 오면 잠만 자고 다시 나갔고, 큰언니가 직장을 그만두고 술에 찌든 아버지를 돌봤다.

하지만 큰집에 계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주정과 괴롭힘은 도를 넘었고 급기야 큰언니는 가출을 해버렸다.


집에 남은 사람은 아버지, 작은 언니, 나였지만 결국  하교 후 아버지를 돌보는 건 나였다. 큰언니에게는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다행히 나에게 폭력을 쓰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밤마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지쳐 갈 무렵 아버지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언니와 조용히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까지도 아버지는 나를 찾지 않으셨다. 작은 언니는 이미 등교를 했는데 나는 점점 불안했다. 일자형 구조로 생긴 집이고 잠들 때 문을 잠그시는 아버지라 그 방을 가려면 창문을 넘어가야 했다.

'그냥 학교를 갈까?

아니야 뭔가 이상해. 이렇게 오래 주무실 분이 아닌데...'

나는 불안을 눈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지가 몇 시간은 지난 듯 경직되어 있었지만 죽음을 처음 목격한 16살의 나는 아버지의 심장 가까이 얼굴을 대어 보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눈물이 났다. 나는 어떡하라고 울면서 부르짖었다. 그 순간마저 나는 내 걱정이 먼저였다.


나는 TV를 좋아한다. 가난했지만 호기심 많던 어린 시절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경험할  일은  TV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주변에는 나처럼 기구한 팔자가 없지만 TV 속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고 그것은 큰 위안이 되었다.


글 하나로 내가 겪은 일들을 다 나열하기엔 너무 부족하다. 특히 사실이 아닌 그때에 내가 느낀 감정들은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 시절의 나를 안아주고 해방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늘 나를 충만하게 채워 줄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데 나는 거기서 길을 잃고 헤매고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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