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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 Oct 13. 2020

나는 엄마의 버팀목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강한 사람. 나의 엄마.

내가 태어나서 28년 동안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한 사람은 김현숙 씨다.


우리 엄마. 김 현자 숙자 여사님.




우리 엄마는 20대 시절 독립영화에 출연하고 주부 리포터로 활동할 정도로 미모가 출중하.


원래는 배우가 꿈이었는데, 아빠를 만나 결혼하게 되면서 그만두셨다고 한다.

지금도 50대 후반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외모와 더불어, 꾸준한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상시 47KG의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내년에는 미즈 코리아 혹 시니어 코리아에 출전하는 게 목표다. 성격도 워낙 10대 소녀 같아서, 가끔은 우리끼리 “누가 엄마고, 누가 딸인지 모르겠다”라는 농담을 주고 받는다.


나는 세 살 때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게 되어 이민 1.5세대로 자랐다. 반면, 우리 엄마는 성적에 집착하고, 공부에 예민한, 전형적인 “한국 엄마”였다. 그래서인지 내가 자라면서,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엄마와 나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부딪히는 부분들이 꽤나 많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의 내가 되기까지 가장 많은 영향력을 준 사람은 우리 엄마라는 것이다. 엄마가 아니었다면 과연 지금의 ‘나란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없다’고 대답할 수 있다.


이민을 간 가정들은 대부분 금전적으로 여유로울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아빠는 이민 시절 초반에 기러기 아빠로 한국에서 지내다,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뉴질랜드로 내가 중학교 때 돌아왔다. 아빠의 사업이 어려울 시간 동안, 우리 엄마는 뉴질랜드에서 유치원과 카페 알바와 더불어 홈스테이를 5명씩 두며 홀로 경제활동을 하며 나와 내 동생을 거의 10년을 키우셨다. 실제로 우리 가족이 뉴질랜드에서 산 시간 동안 홈스테이를 받지 않고 가족끼리 산적이 거의 없다. 오죽하면 어릴 적 내 소원이 우리 가족끼리만 사는 것일 정도였다. 그렇게 빡빡하게, 힘들게, 혼자 가계를 책임지며 아등바등 살던 우리 엄마가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이 내가 좋은 성적표를 받아오는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나는 “철없는 10대”로 살 수가 없었다. 우리 엄마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너는 그 시절 나의 유일한 버팀목이었어.”


나는 그 시절, 우리 엄마의 유일한 낙이자, 기쁨이자, 자랑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다. 우리 동네에는 작은 쇼핑센터가 하나 있었다. 그 쇼핑센터에는 슈퍼부터 옷 가게, 맥도널드 등이 모여있는 곳이었는데, 시내에 나가지 않는 이상 그 쇼핑센터가 유일한 번화가였다. 그 안에는 우리 엄마가 유난히 좋아하던 옷 가게가 있었다. ‘파가니 (Pagani)’라는 옷 가게였는데, 파가니 간판 앞 매대에는 항상 $15 NZD (한화 약 만원)에 세일하는 옷들이 모여있었다. 시즌오프를 한다거나, 작은 하자가 있는 옷들이 주였다. 그 가운데 우리 엄마가 정말 갖고 싶어 하던 핑크색 치마가 있었다. 우리 엄마는 정말이지 창피할 만큼 매일 파가니 앞에 서서 그 치마를 만지작거렸다. 3일째에는 너무 창피해서 나도 모르게 “살 거면 그냥 사!”라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그러면 엄마는 멋쩍게 웃으며 치마를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8일째 날에 파가니를 갔는데, 그 치마가 없어져버렸다. 파가니 직원은 치마가 팔렸다고 답변했다. 그때의 우리 엄마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깟 $15 NZD가 뭐라고, 그걸 못 사서 그렇게 서러운 표정을 지었을까.


그날, 14살의 나는 다짐을 했다. 딱 10년 후에는 우리 엄마가 어딘가에서 옷을 살 때, 가격표를 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끔 만들 거라고. 세일 매대가 아니라, 매장 안에서, 사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어보고 마음껏 살 수 있도록 반드시 내가 만들 것이라고 말이다. 엄마가 갖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걱정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서포트해줄 수 있는, 김현숙 한정 스폰서가 되겠다고.




이렇게나 가슴에 품은 목표가 중요하다.

이런 작은 목표들이 하나하나 모여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목표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100억을 벌겠다던가, 강남에 건물을 소유한다던가, 세계 평화를 위한다던가…… 오히려 꾸밈없는, 진실된 목표와 동기부여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나의 경우처럼 말이다.


아직까지는 백화점을 통째로 사줄 정도의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 김여사 님의 한정 스폰서로서 그녀의 원츠 (Wants)를 물심양면 후원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이루었다. 내 목표를 어느 정도는 이룬 셈이다. 엄마가 나를 위해 그 긴 인내의 시간들을 희생해준 만큼, 나 역시 우리 엄마에게 앞으로의 시간들을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


내년쯤에는 우리 엄마가 미즈 코리아나 시니어 코리아 대회 출전을 해서,

못다 한 꿈을 펼치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김여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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