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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선 Oct 31. 2020

만추의 정취

인생의 가을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하루 종일 이용님의  "잊혀진 계절" 이란 노래를 흥얼흥얼 하는 날이다. 공식처럼 축제처럼 돼버렸다. 콧노래 부르며 아침운동 나섰. 길가 노랑 단풍잎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머릿속에서 갑자기 은행나무숲이 떠오른다. 오래간만에 원적산 공원으로 향했다.     

  어느새 가을깊어졌다. 청청 하늘에 햇빛 찬란하다. 바람 한점 없이 따뜻한 늦가을의  날씨다. 노란 은행잎 오색 단풍잎들이 화려하게 물든 세상은 온통 채색 물감을 뿌려 놓은 듯 울긋불긋 거대한 한 폭의 수채화다. 계절이 자연이 선물처럼 주는 멋진 풍경에 무지개 빛깔에 감탄이 절로 이어진다. 공원 산책길에는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 발길에 차인다. 떨어진 잎새들은 주변에 흩뿌려져 나뒹굴고 있다.  바작바작 소리 내며 걸어가는 이 느낌  묘한 기분이. 주말인지라 삼삼오오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단풍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이 눈에 띈다. 다들 곧 떠나가려는 만추의 풍경이나 운치를 조금이나마 더 붙들어 두고 싶은 듯이 사진을 찍거나 경치를 느끼는 폼이 아쉬움이 묻어 나온다. 최대한 가을을 붙들어 잡고 한껏 즐기고픈 마음들인가 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끼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19가 여전히 ING인 시국에 요란하게 단풍구경 떠날 수도 없고 조용히 인근의 단풍이 곱게 물든 곳을 찾아 가을과 작별하는 수밖에 없다. 올해 연초의 겨울부터 늦가을 현재까지 내내 기염을 토하고 있는 병 사태, 거의 일 년을 뻗대고 물러서지 않는 이 끈질김과 미련함에 인간은 지쳐만 가고. 조심조심 삶과 일상은 여전히 이어져간다. 젊은 연인들은 곱게 물든 단풍길을 손 잡고 걸으며 예쁜 청춘의 추억을 쌓아 간다. 아이와 함께 나온 가족들이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질주하는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띈다. 농구장 축구장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격렬하게 승부하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인다. 화창주말이면 엄청 인파가 모여 웅성이던 체육공원의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천 원적산 공원 은행나무길(사진:김경선 )


  꽃이 피고 지고 나뭇잎이 푸르고 떨어지고 춘하추동 사계절이 교체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때에 따라 순리대로 흘러간다. 나는 사계절 중에서 가을을 가장 좋아한다. 따뜻함과 시원함이 공존하는 푸근함이 좋다. 고운 단풍이 좋다. 울긋불긋 단풍잎들을 바라보며 떠오르는 한 수의  시가 있다.


林亭秋己晩(임정추기만)     숲 속의 정자에는 가을이 이미 깊으니

騷客意無窮(소객의무궁)     시인생각 한이 없어라.

遠水連天碧(원수련천벽)   먼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楓向日紅(상풍향일홍)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에 붉는구나.

山吐孤輪月(산토고륜월)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江含萬里風(강함만리풍)    강은 만 바람을  머금는다.

塞鴻何處去(새홍하처거)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 건지

聲斷暮雲中(성단모운중)     울음소리만 석양의 구름 속에 메아리친다네.


 율곡 이이 선생님이 8살 때 경기도 파주 화석정에서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다. 8살 감성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질 않는 문장력이 경이롭다.


  어떤 이는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절로 찾아드는 울적하고 쓸쓸한 기분 때문에 우울증이 폭발한다고 싫다 한다. 여위고 어수선한 낙엽이 휑하니 비어 있는 내 마음의 뜰에 내려앉는 듯 허전함 쓸쓸함도 언뜻언뜻 느끼지만 오색단풍에 밀려난다. 떨어지기 직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소진하려고 작정이나 한 듯이 가장 빨갛게 곱게 불타 오르는 울긋불긋 단풍을 나는  좋아한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색조의 마법에 빠져 눈에 담아내기 급급하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 들으며 걸어갈 때 만추의 정취 물씬 느낀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의 인생수업 중에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다. 내 맘에 쏙 들어왔던 문구다. 단풍이나 만추 하면 익어감과 성숙함이 연상된다. 그 또한 아름답지 아니한가? 가을 단풍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품이 흐르고 아름다움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인생의 가을 계절을 접한 사람들도 젊은 시절의 풋풋하고 파릇파릇하던 기운들은 사라진 지 꽤 오래되지만 세월 속에 풍파 속에 다져지고 영글어지고 익어져서 진중한 것이 나름대로 멋스럽고 개성이 충만해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천 원적산 공원 단풍(사진:김경선)

  가을 햇살을 가득 머금은 단풍잎들은 곱게 눈부시며 나를 반겨준다. 날아갈 것만 같다. 내년 봄이 오면 더욱 예쁘게 피어나려고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을 보며 새 희망을 읽는다. 낙엽 따라 계절 따라 코로나도 미련 없이 흙으로 삭아들어 영영 자취를 감춰주면 좋을 텐데 하고 잠깐 환상을 품어본다. 세상사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언젠가 깨끗해지는 날이 찾아오리라 믿으며 차분하게 살아가련다. 익을 대로 익어버린 만추의 정취는 더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느낌이다.

  올여름  내 생일에 동생이 보내온  가슴 뭉클한 축하 문자가 뇌리를 스친다. "세월 흘러 어느덧 누나도 이젠 중년이 되어 있네. 계절로 치자면 가을, 가을은 또 가을 나름의 운치와 멋이 있으니 항상 자신감과 웃음 잃지 말고 건강하고 씩씩하기를!" 가끔씩 갱년기 우울감과 허무함에 무기력하고 허탈한 기분이 스멀스멀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몸도 마음도 축축 처져 내린다. 이럴 때 "가을의 운치와 멋"이란 말 떠올리면 위로가 되고 힘이 솟는다.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다.

  인생의 만추라고 해서 주눅 들고 의기소침해질 것도 없다. 그냥 당당하고 활력 있게 살아가는 것이 멋이고 성숙함의 올바른 자세라 생각한다. 인내심과 끈기는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인 나이 때다. 웬만한 일에는 스트레스받거나 고민하질 않는다. 잘 털어내고 잘 통과한다. 살아온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지혜가 쌓여 꿋꿋하다. 어릴 적에는 가지지 못했던 당당함과 높은 자존감에 에너지 충만하고 정서적으로 여유롭다.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와 삶의 균형감각과 밸런스를 찾아낼 줄 안다. 식지 않는 열정으로.

   자연은 비우고 버릴 줄을 안다. 단풍으로 화려하게 수놓고 불태우고 바람에 낙엽으로 떨어져 흙으로 돌아간다. 겨우내 숨을 고르고 봄이 되면 새롭게 소생해서 돌아온다. 끝없는 윤회의 시간이다. 인생의 가을 한가운데 서 있는 나 자신을 되돌아본다. 앞으로 남은 날들 더 성숙되고 성장하고 멋지게 익어가고 단풍처럼 곱게 물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심는다.

  만추의 단풍잎처럼 아름답게 열정을 활활 태우고 싶다. 열정이 식어버리면 삶의 의미가 퇴색해졌다는 증거다. 열정 앞에서는 운명의 여신도 무릎 꿇는다고 했거늘 세상만사 진심으로 진정으로 원하고 찾아 나서면 열정이 도울 거고 동반하리라. 영혼마저도 풍요로워질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열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열정이 사라져서 나이가 든다.》
- 카르멘 델로피체

(네이버에서 퍼  옴. 201180세 때 사진)


  카르멘 델로피체,1931년생의 최고령 현역 모델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모델이다. 황혼에도 활활 불태우는 여름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멋지고 우아함의 극치(极致)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함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하는 모습이다. 열정이야말로 꺼지지 않는 에너지다. 품위 있고 고혹적인 자태, 대단한 자아 관리의 끝판왕이다. 본받고 싶은 부분이다. 외모도 아름답지만 끝없는 열정 앞에 나이는 무색해져 버렸다.

  춘하추동 사계절은 나름대로의 정취가 있는 법이고 황혼 또한 황혼의 은은함이 있다. 사람은 유년, 청년, 장년, 노년 나름의 기품과 아름다운 자태가 있다. 세대별 매력대로 품격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이 최선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열정 앞에 늦음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깊어가는 가을에는 꼭 한 번씩 찾아 듣는 노래가 다. 홍콩 가수 장학우(張學友)의 "추의농"(秋意浓, 가을이 짙어가다)이다. 일본 가수 다마키 고지(玉置浩二) 의 노래이자 중일 합작 드라마 "굿바이, 리샹란"( 别了,李香兰)의 주제곡인 "이카나이데"(行かないで, 가지 말아 줘)를 번안한 곡이다. 잠깐 은행나무숲 밑의 벤치에 앉아 노래에 취해본다. 만추의 정취와 어우러져 더 감미롭게 들려오는 감성 발라드는 한결 더 심금을 울린다.

  10월의 마지막 날에 내 인생의 가을을 헛되이 말아야겠다고 느낀다. 매 순간 소중하게 값지게 보내야겠다. 총알같이 휙휙 지나가는 세월일지라도 즐겁게 하고 싶은 일하며 보람찬 하루하루를 지내자고 자신과 약속했다. 쾌활하게 웃으며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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