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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선 Oct 21. 2020

신사(紳士)라는 것은

"모스크바의 신사"를 읽고

  올해 연초인 1월 중순, 도서관에서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를 100페이지 조금  넘게 읽다가 코로나 19가 터져 도서관 출입이 금지되어 9개월이 지나도 끝이 보이질 않는 현재 시국이다. 무슨 책이든 읽다가 그만두는 경우가  없는 편인데 그만 둔 찜찜함과 호기심에 치솟는 강박증을 주체 못 하고 얼마전 끝내는 구매 해서 완독 해버렸다. 오래간만에 읽은 벽돌장 두께의 717페이지에 달하는 로씨야의 긴긴 겨울밤을 연상시키는 두꺼운 책이지만 너무 재미있게 푹 빠져 통독했다. 지금껏 내가 읽은 러시아 상관 책 중에서 이렇게 재미있게 빨리 읽힘은 전무후무다. 어쩌면 자유스럽지 못한 요즘 시국에 찰떡같이 잘 어울리는 단비 같은 책이 아닐까도 생각한다. 살아남는다는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소설 속 암담한 시대 배경 속에서 진정한 삶이란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념두에 두고 읽는 내내 심사숙고하게 만든 소설이다.


  이 소설의 작가인 에이모 토울스는 1964년 미국 보스턴에서 나고 자라 예일대학교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20여 년간 투자 전문가로 일하다가 40대 후반의 늦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후배한테서 "모스크바의 신사"를 강추받기 전 나는 이 작가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 소설은 에이모 토울스가 2016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발표 당시 미국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국에서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공개한 '2017년에 가장 감명 깊게 읽은 11권'의 목록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며 화제작으로 부상했다. 2019년에는 빌 게이츠가 '여름 추천 도서'로도 권하며 열기를 보탰다.

  책을 고 드는 많은 생각 중에서도 에이미 토울스가 구 시대 귀족 신사의 품격에 남다른 미련과 로망을 버리지 못하는 성향이 농후해서 이렇게 완벽한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라는 신사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무조건 폐물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옛 것이 가지게 되는 존재의 가치와 향수들을 재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


  소설은 1922년 6월 21일 18시 30분에서 1954년 6월 21일까지 32년 동안의 세월과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1905년에 오픈)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백작은 제정 러시아 시대 때 황제 황후와 교류하고 친분을 유지하며 시골에 넓은 영지와 대저택도 가지고 있는 지체 높은 귀족이다. 화려한 모스크바에서 마음껏 사교하고 즐기는 것을 좋아해서 메트로폴 호텔 317호 스위트룸을 장기적으로 투숙한다. 1917년 러시아에 볼셰키 혁명이 일어나면서 귀족사회가 붕괴되고 레닌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진영인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공산국가가 설립된다. 대부분 귀족들은 처형당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당하는 처참한 현실과 마주친다. 로스토프 백작은 젊은 시절인 1913년에 발표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라는 시가 혁명에 동조하는 시라 여겨지며 목숨을 간신히 건져 총살형은 면하게 된다. 백작이 좋아하는 메트로폴 호텔로 돌아가되 한 발작도 호텔 밖을 나 설 수 없는  종신 연금형을 선고받는다. 구체적인 죄목은 없고 굳이 죄를 따진다면 귀족으로 태어난 것이 죄가 된 셈이다. 예전에 장기 투숙하던 똑같은 호텔 공간은 맞지만 스위트룸에서 넓이 9제곱미터의 좁은 다락방 하인용 숙사로 쫓겨나게 된다. 스위트 룸에서 쓰이던 개인 물품들은 인민의 재산으로 몰수된다. 전부의 책과 간단한 가구 몇개, 여동생 옐레나의 초상화만 챙겨서 다락방에 옮겨진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받은 백작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에 대해 궁리를 하게 된다. 첫 번째로 하는 일이 독서다. 아버지가 몹시 좋아했던 몽테뉴의 "수상록"을 읽는다. 아무런 유혹이 없을 때 책 한 권의 유혹에 빠짐도 나쁘지 않다는. 그리고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모색해낸다. 호텔에 구금된 몸일지라도 주변을 관찰할 수 있는 안목과 목적, 적응력을  키워나간다. 호텔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꼼꼼하게 눈여겨보고 살피면서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유한한 공간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배가 난파되어 '절망의 섬'에서 살게 된 로빈손 크루소를 본보기로 삼아 실질적인 일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결의를 유지하려 백작은 계획한다. 시시각각 신사의 품격과 태도를 잃지 않으려 신경 쓴다. 사소할 지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상이 된다면 그 삶은 넘쳐나는 희열과 작은 의미로도 충만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9세의 꼬마 숙녀 니나와 친구가 되고, 세월이 흐른 뒤에 니나가 결혼하고 남긴 재능 많은 소피아의 아버지 역할까지 하며 소피아를 피아니스트로 키운다. 한편 공산당 고위 간부의 개인 교사 노릇도 한다. 열정 넘치게 유명 배우인 안나 우르바노바와 밀회를 즐기고 연인이 된다. 호텔 안의 한정된 공간에서 주변 사람들을 친구로 만드는 친화력과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고 넘쳐난다. 호텔 2층 북동쪽 구석에 조심스럽게 박혀 있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좋은 식당인 보야르스키의 에밀  주콥스키 주방장과 안드레이 지배인, 로스프트 백작 삼인조가 펼치는 3년동안 계획하고 준비한 열 다섯가지 음식재료로 만든 요리들과 와인으로 펼쳐내는 자정의 랑데부는 개인적으로 쫄깃하고 환상적이고 흥미진진한 부분이다. 세사람이 지극정성으로 예술적으로 만든 미식을 음미하며 자신들이 살아온 세월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행복감에 빠져든 자정의 비밀 축제 하이라이트는 안드레이 지배인의 서커스단 저글링이었다. 오렌지 세개로 시작된 저글링이 네 개의 칼로 바뀌어 지는 것이 실로 압권이었다.  순간, 그 시간, 그 우주가 더 할 나위 없는 황홀경이다. 요리와 와인 외에도 백작의 문학, 역사, 음악, 영화, 철학 그림 등을 아우르는 높은 교양과 풍부한 지식에 독자들은 매료되고 푹 빠져든다. 작가의 박학다식한 깊은 내공과 저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운명의 장난 같은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지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진지한 삶의 자세는 바람직하다.

  소설의  거의 끝부분으로 다가가며 오랜 친구 미시카의 죽음을 카테리나에게서 전해 듣는 부분이 인상 깊다. 시대에 배반당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알게 된다.


  "저는 평생 시를 써본 적이 없습니다." 백작이 말했다.

  이번에는 카테리나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럼 <그것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는 어떻게 된 거예요?"

  "그 시를 쓴 사람은 미시카입니다. 티히차스의 남쪽 거실에서였지요...... 1913년 여름에......"


  1905년의 봉기와 그에 따른 피의 탄압이 치열할 때, 미시카가 쓴 시를 경마 클럽 회원이자 차르의 자문역인  분 대자인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이름으로 출판하고 아이러니하게도 백작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1922년에 총살되지 않고 목숨을 구했다며 백작은 카테리나에게 고백한다. 묘한 반전이다. 미시카의 배경을 고려할 때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며 희생양이 된 수많은 사람들, 먼지 같은 인간의 삶들은  격변기의 시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무자비하게 쓸어져 나가버리거나 한없이무기력하다.

  신사란 사전적 의미로 보면 사람됨이나 몸가짐이 점잖고 교양이 있으며 예의 바른 남자를 말한다. 종신형을 선고받은 백작의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신사란 단어가 거론되다니? 모순적이다. 소설 초반에 얼핏 종신형을 선고받고 호텔로 돌아온 장면들을 접 할 때 암울하고 작가가 이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나갈 것인가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뒤로 갈수록 백작의 운명 앞에 굴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낙천적이고 초긍정적인 처사법들을 엿보고 강렬한 희망의 빛을 보게 된다. 세련된 섬세함과 고상함, 운명을 자신의 손에 꼭 거머쥐고 타인에 대한 친절과 배려심,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된 로스푸트 백작은 봄날의 봄바람마냥 주변을 감싸고 품어주는 고상한 신사의 품격을 갖춘 젠틀맨이다. 몸은 비록 연금 상태로 제한받지만 정신만은 공간의 제한 없이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닌다. 신사로서의 지성과 지혜를 갖춘 매력적인 캐릭터에 긍정의 아이콘이다. 클래식 음악의 향연 속에 퐁당 빠지는 부분도 기분 좋은 일이다. 소설속 적재적소에 나오는 차이콥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모자르트의 변주곡과 피아노 소나타 1번곡, 쇼팽의 야상곡, 바흐의 골드베르크변주곡,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 지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으며, 얼마간 장인의 자신감과 견습생의 미숙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것만 같은" 재즈라는 예술 장르 등등을 실제로 찾아 들으며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재미 쏠쏠하다.

  소설을  너무 몰입해서 끝까지 다 읽고 나서 휴하고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부분있었다. 이 매력적이고 멋진 신사 로스토프 백작이 1937년~1938년 옛 소련 스탈린의 대숙청과 1939년~1945년의 제2차 세계대전을 보기 좋게 피해 간 것이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하며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된다. 스탈린의 공포 정치가 만연하던 30년대 후반 소련의 역사 상황을 대입하면 소름이 돋는다. 백작과 같은 귀족은 소리 소문도 없이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몰입이 지나쳐 소설 속 허구의 인물을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인물처럼 착각해 절로 오싹해진다. 그런 상상을 하면 호텔은 오히려 감금지가 아니고 무릉도원으로 전환된 셈이다. 역설적이다. 광란의 대변혁 시대에서는 종신 연금형이 최고의 자유로운 장소로 바뀌었다. 여기서 전해지고 느껴지는 메시지라면 아무리 어려운 곤경에 처할 지라도 고귀한 신사의 품격을 저버리지 않고 태연하게 차분하게 들뜨지도 않으며 자주독립적인 생각으로 임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우아하게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눈 앞의 운명은 일시적으로 혹독할 지라도 미래의 어느 날 어느 순간에 갑자기 희망의 문이 활짝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설 전편에 "환경을 지배하지 않으면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힘차게 흐른다.

  이 소설 마지막의 소피아와 백작의 모스크바 탈출기 부분에서는 영화 "쇼생크의 탈출"도 연상된다. 다리가 세 개인 농을 괴는데 백작은 몽테뉴의 "수상록"을 썼는데 소피아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를 굄대로 설정한 부분, 마지막 부분에 회자되는 영화 "카사푸랑카"의 장면들은 작가의 재치 있는 유머감각과 탁월함이 돋보이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탄탄한 구성도 독보적이다. 소설속에서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연상시키는 장면더러 엿보인다. 이반 투르게네프,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푸시킨, 니콜라이 고골, 이반 곤차로프 등등 많은 러시아 대문호들을 언급했다. 힘겹게 읽었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부활" "전쟁과 평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오리지널 19세기 로씨야 작가들의 소설들과 달리 이 소설은 힘들지 않고 술술 잘 읽히는 것이 편안했다. 미국인 작가의 독특한 시선에서 바라본 시아여서 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미국인으로서 격변기 20세기 초반 러시아를 배경으로 이렇게 재미있고 매력적이고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을 써낸 작가님이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소설을 읽으며 느끼듯이 요즘처럼 코로나 19의 불편하고 막막한 전염병 상황도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자신들만의 지혜로운 삶들을 이겨내고 견뎌내고 이뤄나간다면 어느날 밝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모든 상황영원불변이 아니고 끝이 있는 법이니까. 삶의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내고 부여하는 것이다. 코로나 19라는 보이지 않는 철창 속에서 희망을 잃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언젠가 시원하게 자유롭게 활보하는 날은 꼭 찾아 올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종 가운데 호모 사피엔스가 가장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 본문 중에서


  신사란 무엇인가?어떤 역경과 시련 흐트러짐 없이 세련됨과 고상한 기운 잃지 않고 극복하고 헤쳐 나갈 것이고 적응해 나가는 태연함과 여유로움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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