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배반적인 대답!
완연한 가을을 느끼기에 이번 한 주가 딱 절묘하다. 촛불을 켜면 노랑, 빨강, 파랑(?)과 그 어딘가의 색들이 빛을 발하는 것처럼 지금 단풍이 딱 그렇다. 관악산이 잘 보이는 우리 집 발코니 창을 통해 보면 파란색 대신 초록색 소나무들과 함께 다양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빨강 노랑 그 어딘가의 색들로 물든 커다란 촛불 같은 산을 보며 아침을 맞이한다는 건 크나 큰 축복인 듯하다.
계절의 변화를 20대 시절엔 느낄 수 없었지만 30대 시절에는 의도적으로 느끼려 했고 40대의 지금이 돼서야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걸 넘어서 즐길 수 있게 된 것 같다.
근데 이 계절의 변화를 즐길 수 있게 된 건 아마도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가 아닐까 한다.
20대엔 늘 외로웠다. 많은 친구들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어야 했고 약속이 매일 끊이지 않아야 했으며 늘 바빠야 했다. 나 자신을 성찰할 시간적 여유 따윈 주지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한없이 부정적이거나 외로움이 극에 달하여 우울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20대의 좋은 친구는 술 이었으니 계절 따위 무슨 상관이랴! 그냥 부어라 마셔라 세상은 왜 그러냐 하며 한국인의 특성인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세상이 잘못됐다"를 되뇌었을 뿐!
30대가 되어 결혼을 했다. 안 하려고, 못할 줄 알았던 결혼을 했고 아이를 양육하다 보니 20대의 외로움이 사치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그때 외로움을 더 즐겼어야 했나 할 정도로 정신없이 육아를 했다.
그리고 결혼 초라 각자 자라 온 문화들 위에 세워진 우리의 성격이나 특성들을 사포로 갈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유튜브에서 한 목사님의 설교 중에 "결혼 생활은 빼빠로 갈린다"라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서로의 안 맞는 점을 빼빠로 미친 듯이 갈았다.
갈고 갈고 또 갈면서, 그 갈리는 때만큼은 힘들었지만 중간중간 돌아보면 그 시기가 있어 더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성장을 안 할 것 같았던 자녀들은 벌써 초4, 초2 가 됐고 영원히 경력 단절될 줄 알았던 아내는 정말 좋은 회사에 다니면서 재정적으로도 부족하지 않았고 노후에 대한 대비도 조금씩 하는 이 시기가 되어 뒤를 돌아보니 결혼 11년 차!
1만 시간의 법칙 이란 책을 접했을 때 한 분야에 1만 시간을 투자하면 전문가가 된다라고 했다. 물론 이건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어쨌든 1만 시간을 투자하면 1도 투자 안 하는 것보단 전문가가 맞을 것이고 10년을 결혼생활을 했으니 나름 결혼이라는 직업을 가졌다면 준 전문가는 됐다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부부 사이에선 빼빠로 갈갈이 갈려야 하는 부분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이건 30년 된 우리 부모님을 봐도 갈리지 않는 것이니 그냥 안 갈린다라고 넘어갈 수 있지만 지나 온 세월 동안 갈려서 지금의 행복을 찾았으니 지금도 갈려야 미래에 더 행복한 생활을 보낼 수 있다는 얄팍한 경험으로 또 갈아야 했다.
여전히 난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지 아내는 계속 의심을 한다. 요즘은 운동도 열심히 하고 처음 배운 수영이 너무 재밌어서 주 2회에서 3회로 늘렸고, 저녁 9시에 주 3회를 다니면서 애들 재우거나 회사에서 야근이 필요할 때 못할 수 있어 새벽반으로 옮기려는 시도까지 하고 있다.
몸이 20대의 시절로 돌아가려고 하니 아내가 보기엔 이 남자가 뭔가 있다라고 생각한다. 심각하게는 아니지만 자기는 운동도 안 하고 늙어간다며 상반되는 나를 보며 이 남자 분명 바람피우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의 질투를 날리기도 한다.
이 모든 게 자기를 사랑한다는 표현이 없으니 의심부터 든다며 싸이버 러버에 빠져있는 아내에게 나 역시 툴툴거리며 얘기했지만 변하지 않는 내 모습을 보며 '와! 왜 그 사랑한다는 말을 할 생각조차 안 했을까' 하는 후회가 되돌아올 뿐!
아내가 주말에 푹 쉴 수 있도록 하는 내 배려는 역시나 무용지물 이었지만 가끔씩 아내가 아는 언니들과 만나서 내 자랑을 신나게 하면서 마지막 쐐기를...'그래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고 싶다'라고 말하면 그 언니들이 아내에게 쌍욕을 해줘서 너무 고마웠다. 말보다 행동인 남편을 만나 복 받은 줄 알아라라고 정신교육을 단단히 시켰고 모임을 마친 아내가 돌아와서 이런 얘기를 해주면 그 언니들에게 소고기라도 사줄걸 하는 마음이 든다.
어쨌든, 11년 차가 되어도 여전히 우린 서로를 빼빠로 갈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훗날 우리의 결혼생활을 더 행복하게 해 준다는 믿음을 갖고 계속 진행한다.
이 좋은 가을! 회사에서 청첩장을 돌리려 방문한 여직원이 선물과 함께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회사특성상 여직원과 남직원의 비율이 8:2 정도로 여직원이 많고 한국의 결혼율? 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다들 알아서 다 짝을 찾고 결혼은 잘만하던데... 통계가 믿을만한 건지 잘 모르겠더라!
여직원들이 찾아오면 내 처음 대답은 이렇다.
"결혼 좀 늦게 해도 돼요. 정말 좋은 배우자인가요?"
아주 진지하게는 아니고 농담하듯 건넨다. '왜 이렇게 빨리해요? 좀 더 생각해 봐요 '라고 말하면 주변 동료들이 꼰대라고 놀린다. 웃으면서 말하지만, 농담처럼 말했지만 내 질문에는 이런 의미가 있었다.
결혼 11년 차이니 준 전문가?.. 아니 야매 전문가로서, 내 경험으로써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면 결혼만큼 좋은 건 없다.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긴 한데 뉴스를 보면 이혼하는 부부 역시 쉽게 볼 수 있다. 이혼이 잘못됐다 가 아니라 얼마나 결혼생활이 힘들면 그 큰 축복을 받으며 어렵게 한 결혼 생활을 돌이킬까였다.
결혼생활이 늘 행복할 수는 없지만 행복보다 얼마나 더 큰 힘듦이 있으니 이혼할까 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느끼다 보니 결혼하려 청첩장 돌리는 직원이 올 때마다 결혼을 추천해 줄 수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아니면 마음을 읽는 안경에 "난 진짜 열라 착한 사람"이라고 써진다면 '브라보! 결혼 축하해요'라고 매우 매우 추천하겠지만 그걸 알 수 없으니 어떻게 추천해 줄까!
하지만 저 멘트를 하고 난 다음 꼭 해주는 말이 있다.
'좋은 사람과 지내는 결혼생활은 너무 행복합니다.'
근데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는 내가 알 수는 없고 그냥 서로 빼빠에 갈리듯 갈리면서 당장은 힘들어도 그 갈리는 시기를 뒤돌아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면 어느 순간 결혼생황이요? 진짜 행복해요!
PS. 아내가 요즘 나보고 젊어지고 피부도 좋아지고 광이 난다며 어느 여자를 만나냐고 한다.
여보! 바람을 피우면 제일 먼저 없어지는 건 돈과 시간이야!라고 대답했더니 돈 많은 여자를 만나서 그렇다고 한다.
글쎄... 이 얼굴에 이 키에.... 그게.... 가능 키나 할까... 내가...라고 대답하니 빵 터지셨다.
'사포를 더 갖고와야겠다! 더 갈아야겠구나!‘